[책갈피 속의 오늘]1907년 이준 열사 순국

  • 입력 2004년 7월 13일 19시 2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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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 열사는 할복했는가.

그렇지는 않다.

이준 열사가 네덜란드 헤이그의 한 병원에서 세상을 뜬 것이 1907년 7월 14일. 그의 나이 48세였다.

그의 사인에 대해서는 자결(自決), 병사(病死), 단식 순절(殉節)설이 전하나 그 모두 분명치 않다.

그는 장기간 기차여행에 따른 여독(旅毒)에다 정신적 피로가 쌓여 병원에 입원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설에 의하면 종양이 악화되었다고 하고, 패혈증 등 합병증을 일으키는 ‘단독(丹毒)’이 도져 숨졌다고도 한다.

함께 ‘헤이그 밀사’로 파견됐던 이위종은 그가 사망하자 기자회견을 갖고 “이준 열사는 순국(殉國)했다”고 밝혔다.

이날 공개된 이준 열사의 유언은 우국충정으로 가득했다. “나라를 구하시오! 일본이 끝없이 유린하고 있소….”

당시 널리 할복자살설이 유포된 것은 항일투쟁을 독려함으로써 그의 유지(遺志)를 받들고자함이 아니었을지.

그래서인지 일제는 궐석재판까지 열어 숨진 이준 열사에게 종신형을 선고했다.

이준 열사는 한국 최초의 근대적 사법교육기관인 ‘법관양성소’의 제1회 졸업생이다.

그는 강직한 검사였다.

1896년 한성재판소 검사보로 임관되었으나 조신(朝臣)들의 불법과 비행을 파헤치다 한 달 만에 면직됐고 이후로도 망명 투옥 유배의 간난신고를 겪었다.

그는 고종의 종친이었다. 밀사로 떠나기 전야(前夜)에 고종은 그를 불러 어사주를 내렸다. “오늘밤 짐은 골육지친(骨肉之親)을 만나 국가대사를 의탁하게 되니 기쁘기 한량없다.”

이준 열사 일행은 만국평화회의에서 각국 대표에게 일제의 한국 침략을 규탄하며 국제여론을 환기했으나 열강들의 반응은 싸늘하기만 했으니.

이들이 고군분투하고 있던 바로 그때에 국내에서는 친일파들이 나라를 팔아먹지 못해 안달을 하고 있었다.

특히나 밀사 파견에 따른 일제의 ‘고종 퇴위공작’엔 이완용과 송병준이 앞장을 섰다.

참으로 무도(無道)한 인간이었던 송병준. 그는 고종에게 이렇게 따졌다. “친히 도쿄로 가시어 천황께 사죄를 하든가, 자결을 하시지요….”

그 친일파의 후손들이 매국(賣國)의 대가로 얻은 땅을 되찾고자 소송을 벌이고 있다고 하니!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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