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187>卷四. 흙먼지말아 일으키며

  • 입력 2004년 6월 24일 18시 4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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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王이 되어(10)

한신의 마음가짐이 그러하니 맡은 일을 제대로 할 리가 없었다. 한왕이 남정(南鄭)에 이른 뒤에도 군중의 일은 제쳐놓고 틈만 나면 술을 마시거나 군사들과 어울려 다니며 못된 짓을 했다. 술도 못된 짓도 맛들이면 늘어나는 법이라, 그 때문에 갈수록 한신의 평판은 나빠졌다. 그게 다시 자포자기로 번져 더욱 한신을 대담하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동안 못된 짓을 함께 해온 군사 여남은 명과 진채를 벗어난 한신은 부근의 한 토민(土民) 마을을 덮쳤다. 범 같은 군사 여남은 명이 시퍼런 창칼을 들이대자 크지 않은 마을은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그들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들은 마치 적지를 점령한 것처럼이나 마을을 뒤져 술을 거두어들인 뒤에 대낮부터 퍼마셨다. 그리고 술이 취하자 더욱 거칠어져 마음대로 재물을 노략질하고 부녀자까지 겁탈했다.

하지만 결국은 술이 화근이 되었다. 아무도 말리는 사람 없이 마신 술에 그들 여남은 명 모두 곯아떨어지자, 성난 마을 사람들은 그들을 꽁꽁 묶어 가까운 한군(漢軍) 진채로 끌고 갔다. 하필 성미가 불같기로 이름난 관영(灌영)의 진채였다.

마을 사람들이 울면서 한신네 패거리가 한 못된 짓거리를 일러바치자 관영이 불같이 성을 냈다.

“대왕께서는 무엇보다 민폐(民弊)를 엄히 금하시고 있거늘, 저놈들이 감히 벌건 대낮에 백성들을 약탈하고 욕보였단 말이냐? 여봐라. 저놈들을 끌어내어 여럿이 보는 앞에서 목을 베어라. 그 다음 그 머리를 군문에 높이 내달아 모든 사졸들에게 군율(軍律)의 무서움을 일깨워주라!”

그렇게 소리치며 아직 술에서 제대로 깨나지도 못한 그들을 끌어내 목 베게 했다. 그 바람에 군문 앞으로 끌려 나간 한신네 패거리는 누구 손에 왜 죽는지도 모르면서 하나둘 목을 잃어갔다.

한신이 제정신을 차린 것은 이미 패거리 열세 명이 모두 목을 잃은 뒤였다. 마지막으로 목을 잘린 군사의 끔찍한 비명 소리에 술에서 확 깨어난 한신은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경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마침 태복(太僕) 하후영이 그 소란에 이끌려 관영의 진채로 왔다가 여럿 사이에 끼어 구경을 하고 있었다.

“등공(등公), 등공. 나를 모르시겠습니까?”

한신이 하후영을 보고 다급하게 소리쳤다. 하후영은 예전 한왕이 항량의 군막을 드나들 때부터 언제나 그 수레를 몰고 함께 나타나 한신에게 낯이 익었다. 홍문의 잔치에 한왕을 따라 왔을 때는 등공이라 불리던 걸 기억하고 한신은 그에게 매달려 보기로 했다.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하후영이 그 죄수를 보니 어딘가 낯이 많이 익은 듯 했으나 누군지 얼른 기억나지 않았다. 손을 저어 일단 참수(斬首)를 멈추게 해놓고 떨떠름하게 물었다.

“너는 누구냐? 어떻게 나를 아느냐?”

“벌써 저를 잊으셨습니까? 서초패왕의 군막에서 집극랑으로 있던 한신입니다. 무신군이 살아계실 때부터 패왕을 곁에서 모셔 언제나 대왕과 함께 다니시는 등공을 알고 있었습니다.”

“패왕의 집극랑? 그런데 네가 왜 거기 있느냐?”

하후영이 더욱 어리둥절해 물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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