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영혼을 훔치는 사람들’…淸代 마녀사냥 범인은 ‘생활苦’

  • 입력 2004년 6월 4일 17시 2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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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청대에는 한족 남자들도 모두 변발을 해야 했다. 1768년 이 변발을 잘라내면 영혼을 훔칠 수 있다는 괴담이 돈 데에는 만주족의 한족화라는 시대적 징후가 담겨 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중국 청대에는 한족 남자들도 모두 변발을 해야 했다. 1768년 이 변발을 잘라내면 영혼을 훔칠 수 있다는 괴담이 돈 데에는 만주족의 한족화라는 시대적 징후가 담겨 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영혼을 훔치는 사람들/필립 쿤 지음 이영옥 옮김/464쪽 1만8000원 책과함께

미스터리소설 또는 공상과학소설을 연상시키는 제목의 이 책은 250년 전 중국에서 벌어진 대중적 광기를 추적한 역사서다.

강희-옹정-건륭으로 이어지는 청(淸)대 최전성기의 마지막 황제였던 건륭제의 통치가 무르익던 1768년. 그 전성기의 혜택을 가장 많이 누리던 저장(浙江)·장쑤(江蘇)·안후이(安徽)성 일대를 뜻하는 장난(江南)에서 중세 유럽의 마녀사냥을 연상시키는 사건이 발생한다.

진원지는 저장성 더칭(德淸)의 하천 다리를 놓는 공사장이었다. 다리 기둥에 누군가의 이름을 적은 종이쪽지를 말뚝으로 꽂아 넣으면 그 영혼을 훔쳐낼 수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청나라 관료들은 이런 대중적 미신에 냉소적 태도를 보였지만 소문은 꼬리를 물고 퍼져나갔다. 소문은 만주족 통치의 상징인 변발(둘레는 밀어 깎고 나머지는 뒤로 길게 땋아 내린 머리)을 잘라내면 영혼을 빼앗긴다는 것으로 바뀌어 한 달 만에 장난 일대를 휩쓴다. 다시 두 달이 지나서는 800km나 떨어진 후베이(湖北)성을 거쳐 수도 베이징(北京) 인근 산둥(山東)성까지 번져간다. 공포에 사로잡힌 군중은 ‘영혼을 훔친 용의자’로 지목된 사람에게 집단폭력을 휘둘렀고 사태는 살인으로까지 치달았다.

급기야 황제에게도 보고가 올라가고 황제는 뒷짐을 지고 있던 관리들에게 주모자인 대요술사를 잡아낼 것을 명한다. 영혼을 훔치는 자들에 대한 국가적 조사가 시작된 것이다.

집중조사 결과 대부분의 사건이 집단폭행과 고문에 의해 조작됐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소문의 발단도 알력을 빚고 있던 더칭의 두 사찰에서 퍼뜨린 소문이 와전된 것이었음이 어렴풋이 밝혀진다. 황제는 모든 책임을 초동수사 실패에 돌리고 해당 관리들을 엄벌에 처하는 것으로 사건을 종결한다.

이 책의 묘미는 이런 감춰진 소동의 전말을 소개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소동을 일으킨 진짜 범인의 정체를 밝혀내는 역사학적 추리력에 있다. 미국 하버드대 중국사 교수인 저자는 프랑스 심성사적 전통에 입각해 지극히 황당무계한 사건이 군중 공포로 확산된 원인을 당대의 경제사회적 변화와 건륭제의 교묘한 통치술에서 읽어낸다.

당시 경제가 호황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결과로 인한 인구증가의 속도는 더 빨랐다. 1700년 1억5000만명이던 중국 인구는 1794년 3억1300만명으로 2배 이상 증가한다. 1720년대 천민제와 요역제의 폐지는 농민의 예속상태를 해방시켜 준 듯하지만 실은 생계수단의 상실이라는 더 큰 압박으로 다가왔다. 농민들은 비단 제조 등 방직업 노동자로 내몰리면서 쌀값 폭등 같은 물가상승 압력에 맞서야 했다.

이는 결국 잠재적 경쟁자인 유휴노동자에 대한 무의식적 공격 성향으로 발전했다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다. 이는 ‘영혼을 훔치는 자’로 지목돼 희생양이 됐던 이들이 주로 떠돌이, 승려, 도사, 거지였다는 점에서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

한편 건륭제는 한 해 전인 1767년 버마 공략의 실패로 인한 정치적 권위 상실의 국면 전환을 위해 이 사건을 부각시켰고 관료들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이 사건에 변발이 관련된 점은 만주족이 점차 한족(漢族)문화에 동화돼 가는 것에 대해 지배세력이 불안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얼핏 역사적 맥락에서 동떨어진 듯한 돌출사건에서 거미줄처럼 중층으로 얽힌 시대상황을 읽어내는 저자의 독해력이 감탄스럽다.

원제 ‘Soulstealers’(1990년)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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