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향랑, 산유화로 지다’…열녀, 여자를 두번 죽이는 이름

  • 입력 2004년 6월 4일 17시 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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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용의 '협농채춘(挾籠採春)' 간송미술관 소장
윤용의 '협농채춘(挾籠採春)' 간송미술관 소장
◇향랑, 산유화로 지다/정창권 지음/236쪽 1만800원 풀빛

조선 숙종 28년(1702) 경상도 선산부 상형곡(현 경북 구미시 형곡동)에서 양인(良人) 출신의 한 여인이 자살한 사건이 발생했다. 어렸을 때 어머니를 잃고 계모의 슬하에서 자란 향랑(香娘)이란 이름의 이 여인은 17세에 같은 마을에 사는 14세의 칠봉에게 출가했다. 남편 칠봉은 외도를 하면서 그에게 폭력을 휘둘렀고, 향랑은 결국 3년 만에 이혼을 하고 친정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친정 부모는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숙부에게 찾아가 의탁했지만 숙부도 얼마 후 그에게 개가를 종용했고, 향랑은 하는 수 없이 다시 시댁을 찾아갔다. 그러나 남편의 횡포는 여전했고 이번엔 시아버지까지 개가를 권유했다. 오갈 데 없는 처지가 된 그는 낙동강의 지류인 오태강으로 가서 나무하는 한 소녀를 만나 자신의 기구한 인생사를 이야기하고 ‘산유화(山有花)’란 노래를 부른 뒤 강물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이 사건을 보고받은 선산부사는 향랑이 절의를 지키기 위해 자결했다며 그를 열녀로 중앙정부에 추천했고, 2년 뒤에 드디어 임금은 향랑을 ‘정녀(貞女)’라 부르고 그 무덤 옆에 비석을 세우도록 했다.

“향랑은 시골의 무식한 여자로서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는 의리를 알아 죽음으로써 스스로를 지켰고 또 죽음을 명백히 하였으니, 비록 ‘삼강행실(三綱行實)’에 수록된 열녀라도 이보다 낫지 않다”는 것이었다.

향랑은 열녀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고 18, 19세기의 문인들은 전(傳), 한시, 소설, 잡록 등 20여 편의 작품으로 향랑의 삶을 기록했다. 이 ‘열녀’의 무덤은 현재 경북 구미시 형곡동 산 21번지에 있는데, 그가 자결한 음력 9월 6일이면 매년 그의 묘 앞에서 묘제(墓祭)가 열린다.

저자(고려대 한국학연구소 연구원·국문학)는 “향랑은 열녀가 아니라 18세기경 가부장제가 정착해 가는 과정에서 발생한 비극적 사건의 희생자였다”고 주장하며 이 여인의 자살사건을 다시 추적해 간다.

그에 따르면 향랑은 무조건 남편에게 다소곳하게 순종했던 여인이 아니라 억척스럽게 현실을 살아낸 여인이었다. 그는 외도를 하며 폭력까지 일삼는 남편과 맞서다가 이혼을 한 뒤, 이혼한 여자를 천시하는 풍습이 자리 잡아 가던 18세기 초 조선의 현실에서 발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자살을 택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처가살이가 일반화돼 있었고 남녀가 논밭에서 동등하게 노동했던 조선 초까지는 부부관계나 재산 상속, 이혼과 재혼 등의 문제에서 남성과 여성의 지위에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성리학적 이상국가를 표방한 조선이 건국된 뒤 15, 16세기에 성리학적 가족제도가 사회 전반에 스며들었고, 임진왜란(1592) 병자호란(1636) 이후 지배층이 예학(禮學)을 강조하며 무너진 사회체제 회복을 시도하면서 완고한 가부장제가 확립돼 갔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혼과 재혼, 외도와 가정폭력 등의 문제를 파헤쳐 가며 가부장제가 18세기라는 역사의 한 시기에 만들어진 산물임을 밝혀 간다.

가부장제의 허상과 폐해를 비판적으로 재평가하려는 저자의 의도가 너무 앞서가다 보니 ‘향랑’을 둘러싼 픽션과 논픽션, 주장과 사실이 혼동되는 부분도 적지 않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21세기 한국사회의 가족제를 한발 물러서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김형찬기자 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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