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93년 ‘이인모 노인’ 북한송환

  • 입력 2004년 3월 18일 18시 5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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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3월 19일. 우여곡절 끝에 미전향 장기수 ‘이인모 노인’(당시 74세)이 판문점을 넘었다. 문민정부가 출범한 지 22일 만이었다.

이씨의 북한 송환은 김영삼 대통령이 언론사 간부들을 만난 자리에서 ‘불쑥’ 꺼냈다. “취임 후 첫 대면이니 선물을 하나 주겠소!” 관계부처간에 의견조율도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집권 초기 치솟는 인기에 취해 있던 YS 특유의 ‘감’과 ‘순발력’이었다. 그러나 엎질러진 물이었다. 정부는 3월 11일 서둘러 이씨의 송환방침을 발표한다.

놀라운 것은 북한의 반응이었다. 바로 그 다음날 북한은 돌연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했다. 기상천외의 타이밍이었다.

그러나 정부는 예정대로 이씨를 보냈다. 대통령 취임사에서 “어떤 동맹국도 민족보다 우선할 수 없다”고 했던 YS의 뚝심이었다. “동기가 좋으면 결과도 좋다.”(?)

대다수 국민도 정부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인도주의는 ‘때문에’(상호주의)의 논리가 아니라 ‘불구하고’(퍼주기?)의 논리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오랜 수형생활로 악화된 이씨의 건강도 고려됐다. 국제사면위원회는 그를 정치적 희생자로 보고 있었고, 이씨는 북으로 가든 남쪽에 있든 ‘정치선전’에 이용될 소지가 다분했다.

이씨는 6·25전쟁 당시 지리산에서 빨치산 활동을 하다 체포돼 34년간 복역했다. 1990년 ‘말’지에 ‘북한의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가 소개되면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어디 이씨뿐일까. 미전향 장기수들의 사연은 구구하다. 절절하다. 어쨌거나 그들은 ‘냉전(冷戰)의 포로’다. 2000년 DJ 정부가 그들을 모두 북으로 돌려보낸 것은 잘한 일이었다.

그중엔 ‘납북어부’ 출신의 공작원(간첩)도 있었다. 얼마나 기구한가.

북으로 납치돼 전향을 강요당했을 터이고, 남쪽 사정에 훤하다는 이유로 간첩으로 내려왔다 체포됐으니. 신념 때문이든 북에 두고 온 가족 때문이든 끝까지 버텨야만 했으니.

고향인 남쪽의 가족을 등진 이들도 있었다. 93세 노모를 두고 떠나기도 했고, 부인과 생이별을 하기도 했다.

대체 그 무엇이….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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