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털'…도전적인 사람은 수염을 기른다?

  • 입력 2004년 1월 30일 17시 1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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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다니엘라 마이어 외 지음 김희상 옮김/239쪽 9800원 작가정신

남편은 몇 겹의 날을 가진 면도기로 매일 아침 말끔한 턱선을 만든다. 아내는 머릿결을 촉촉이 가꿔주는 샴푸로 머리를 감으며 하루를 시작한다. 눈썹을 진하게 그려내는 것도, 딸아이의 머리에 곱게 방울을 달아주는 일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잠깐, 우리는 이 모든 일이 항상 똑같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우리 조상들의 초상화를 연상할 것도 없다. 서구에서 ‘수염파’와 ‘면도파’는 오랜 시간에 걸쳐 힘을 겨뤄왔다. 16세기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는 아름다워 보이기 위해 매일 정성껏 눈썹을 뽑았다. 자기표현 방식에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이란 없는 것이다.

이 책은 입고 벗을 수 없는 장신구인 머리카락과 수염, 체모(體毛)를 다듬고 혹사하고 때론 ‘탄압’해 온 인류사의 기록을 담고 있다.

● 수염이 사라지고 있다

한때 수염은 좌파의 상징이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 레닌, 트로츠키, 호치민, 체 게바라가 모두 ‘수염파’였다. 카스트로는 한 인터뷰에서 “면도를 하지 않으면 매년 열흘의 시간을 혁명 구상에 더 쓸 수 있다”고 자랑했지만 훗날 좌파 이데올로기의 차별성이 없어진 것에 빗대어 “이제 혁명은 깔끔하게 면도를 당하고 말았다”고 털어놓았다.

수염은 자주 종교적 신념과 결부되지만 그 표현은 엇갈린다. 대부분의 경우 수염은 수도생활을 의미했지만, 중세 영국에서는 ‘성직자는 면도하지 않은 지저분한 모습을 보이지 말라’고 가르쳤다. 오늘날 서구 문화권에서 95%의 남자들이 규칙적으로 면도한다. 현재로서는 ‘면도파’의 완승이다.

●유혹하는 머릿결

서구사회에서 가발을 쓰고 벗는 풍습의 원조는 자신의 대머리를 감추고 싶었던 프랑스의 왕 루이 13세다. 권위의 상징으로 번창일로를 걷던 가발은 그러나 19세기 시민혁명기를 맞으며 한순간에 사라져버렸다.

1908년 발명된 파마 약은 독성이 강해 적당히 ‘순화’될 때까지 20년이 더 걸렸지만, 파마를 한 뒤 적당히 부풀도록 빗질을 한 머리는 단정한 여성다움의 상징으로 오래 사랑받았다. 이와 달리 긴 생머리는 대체로 충동적인 욕망의 대상으로 간주됐다. 이슬람뿐 아니라 다른 여러 시대와 문화권에서도 늘어뜨린 생머리는 오직 남편에게만 보여주도록 종종 규정됐다.

때로는 머리 색깔이 성적 기호의 상징이 됐다. 유럽에서 ‘빨간 머리’는 섹스에 적극적인 여성의 표시로 여겨져 왔다. 반면 아동문학 분야에서 빨간 머리는 고집스럽고 특이한 성격을 나타냈다. 말괄량이 삐삐, 빨간 머리 앤, 개구쟁이 푸무클과 샘이 그들이다.

●매끈한 피부가 좋다

과거에는 모든 문화권에서 오직 여성들만이 체모 제거라는 ‘고문’을 감당했다. 그리스 여인들은 등잔불로 종아리 털을 지져댔다. 최근에야 이 전통은 남성에게도 적용되기 시작했다. 액션 영화에 등장하는 근육질 배우들이 체모를 없애 울퉁불퉁한 신체 윤곽의 광택을 강조하면서 남자의 ‘전신 면도’는 새로운 유행이 되기 시작했다.

저자는 ‘가장 은밀한 그곳’에도 돋보기를 들이댄다. 동양권 일부에서는 털 한 오라기 없는 매끈한 여체를 선호해 천에 끈끈한 액체를 적셔 몸에 덮어둔 뒤 마르면 잡아채는 방식으로 털을 제거했다(이런 모습은 황석영의 장편소설 ‘심청’에도 등장한다). 독일어권에서 여성의 음모는 58가지로 일컬어지는데, 이 중에는 ‘자연보호구역’ ‘오아시스의 야자수’ 등의 표현이 있다.

●권위에의 복종 또는 도전의 표현

사소하고 시시콜콜한 기록들이 숨쉴 틈 없이 가득 펼쳐지는 책장 사이에서 독자는 길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염려할 필요는 없다. 어느 골목에서든 폭죽과 같이 사정없이 터져 나오는 ‘사실’들을 즐기기만 하면 된다.

수많은 사례들을 통해 저자가 강조하고자 한 것은 무엇일까. 매일 아침 머리 코 턱 주변의 털을 가다듬는 일이, 사실은 당신이 속한 사회의 권위에 복종할 것인가, 아니면 도전할 것인가라는 선택임을 상기하는 것,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원제 ‘Von der Kunst, Locken auf Glatzen zu drehen’(2003).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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