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105>卷三. 覇王의 길

  • 입력 2004년 1월 29일 18시 4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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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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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말을 달려오던 장수가 투구를 벗어들며 큰 소리로 왕릉(王陵)의 말을 받았다.

“형님은 벌써 이 아우를 잊으셨습니까? 풍읍(豊邑) 중양리(中陽里)의 유계(劉季)입니다.”

그 말을 듣자 이번에는 왕릉의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업신여기는 표정을 겨우 감추고 억지 미소를 지어 아는 체를 했다.

“누군가 했더니 유계 아우였구려. 무안후(武安侯)에 탕(탕) 군장(郡長)이 되어 위세를 떨친다는 소리는 나도 진작부터 들었소. 지금쯤은 함곡관을 지나 함양으로 쳐들어가고 있는 줄 알았는데 여기는 어쩐 일이오?”

패공 유방은 그런 왕릉을 보자 앞뒤 없는 분노와 울화가 울컥 치솟았다. 왕릉의 표정이 처음 자신이 패공으로 추대되었을 때 옹치(雍齒)가 짓던 표정과 너무도 닮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패공은 오히려 얼굴 가득 웃음을 지으며 넉살을 떨었다.

“저도 형님께서 의(義)를 짚고 일어나시어 천하를 위해 애쓰신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하지만 신룡(神龍)같은 형님의 자취를 좇을 길이 없어 매양 궁금하더니, 이제 보니 여기 이렇게 웅거(雄據)하고 계셨군요.”

그렇게 왕릉을 추켜놓고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어 말을 이었다.

“형님 말씀대로, 나는 대왕[초 회왕]의 명을 받아 관중으로 가는 중입니다만 원체 세력이 미약하고 등 뒤 또한 불안해 잠시 길을 돌고 있습니다. 군사와 물자를 풍족하게 만드는 한편 등 뒤에 강한 적을 남겨두지 않기 위해 한(韓)나라 옛 땅부터 회복하고 있는데, 며칠 전에는 남양태수 여의가 완성(宛城)을 들고 항복해와 적잖은 보탬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아우는 아직 관중으로 쳐들어가기에는 힘이 턱없이 모자라 인근의 성읍(城邑)을 돌며 뜻 있는 이들의 호응을 비는 중입니다. 형님께서도 이 못난 아우와 함께 관중으로 드시어 무도한 진나라를 쳐 없애는데 힘을 보태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말투는 공손하지만 내용은 투항을 권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어 패공을 따라온 고무후(高武侯) 척새(戚새)가 거들었다.

“양후(襄侯=왕릉의 당시 封號)께서는 이 척 아무개를 알아보시겠소? 아시는 바처럼 패공은 초왕(楚王)께서 직접 부월(斧鉞)을 내리시며 진나라 정벌을 명한 상장군이시오. 이제 저는 아무 이룬 바 없이 고단하게 떠돌던 무리와 함께 패공께 투항함으로써 일찍이 품었던 뜻을 앞당겨 이뤄보고자 하오. 양후께서도 애써 기른 세력을 이런 구석진 곳에 묶어두지 말고, 저와 함께 패공을 도와 진나라가 망하는 날을 앞당겨보시지 않으시겠소?”

그 말에 왕릉의 얼굴이 언뜻 일그러졌다. 하지만 뒷날 천하의 주인이 된 한(漢)의 우승상(右丞相)에 안국후(安國侯)로 떠받들어질 사람이요, 방금도 1만 명이 넘는 무리를 이끌고 있는 우두머리답게 왕릉은 자신의 마음을 다스릴 줄 알았다. 아니꼬움과 부러움으로 뒤틀린 속을 억누르며 먼저 척새의 말에 대꾸했다.

“고무후의 깨우침은 고맙기 짝이 없소이다만, 내 형편이 따라주지 않는구려. 겉보기에는 1만 명이 넘는 머릿수를 자랑하나 여기 이 사람들은 기실 전란을 만나 떠도는 유민들에 지나지 않소. 싸울만한 젊은이는 몇 천도 안 되고, 병장기는 그 절반에게도 돌아가지 못하는 게 이들의 실정이오. 거기다가 돌보아야할 부녀자와 노약자가 장정보다 훨씬 더 많으니 이를 어찌 세력이라 일컬을 수 있겠소? 당장은 누구를 돕기는커녕 하루하루 이들을 보살피고 거두기도 힘에 부칠 지경이외다.”

그래놓고는 패공을 돌아보며 한층 공손한 어조로 말했다.

“한때는 형아, 아우야 하며 지냈으나 시절이 엄중하니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을 사사로운 정으로만 가릴 수는 없게 되었소. 고무후의 말씀대로 패공께서는 천하의 여망을 짊어지고 진나라를 쳐 없애러 가는 정서군(征西軍)의 총수이시라, 같은 대의로 몸을 일으킨 나로서는 마땅히 패공의 명을 받들어야 할 것이오. 그러나 거느린 게 워낙 보잘것없는 머릿수에 갈가마귀 떼처럼 어지러운 군사라 명을 받들려 해도 감히 그럴 수가 없소이다. 패공의 대군이 나아가는데 도움은 주지 못하고 오히려 짐이 될까 두려우니, 저는 이대로 여기 남아 성원(聲援)이나 드리는 편이 나을 것 같소. 뒷날 힘이 닿으면 그때는 개나 말의 수고로움이라도 마다 않고 패공을 받들겠소이다.”

말은 이미 패공의 세력 아래로 든 것처럼 공손하였으나 내용은 분명하게 투항을 거절하고 있었다. 패공도 그 뜻을 잘 알아들었다. 그래도 옹치처럼 맞서려들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기고 그쯤에서 좋게 마무리하고 싶었다.

“왕형께서 이 유(劉)아무개를 그리 크게 보아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형의 형편이 정히 그러하시다면 뜻대로 하십시오. 이곳에 남아 무리를 다독이며 저의 뒤를 보아주신다면 그 또한 마음 든든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왕릉의 말뿐인 투항을 받아들여 주었다. 자존망대(自尊妄大)하여 남의 밑에 들기를 싫어하는 왕릉을 억지로 굴복시키려 하다가 옹치에게서 당한 욕을 되풀이 당하고 싶지는 않아서였다.

왕릉이 진정으로 항복하고 패공 밑에 들게 되는 것은 훨씬 뒷날이 된다. 그 때문에 ‘사기’와 ‘자치통감’은 왕릉이 항복한 시기를 패공이 관중에 들기 전으로 적어두었고, ‘한서’는 훨씬 뒤 패공이 파촉(巴蜀)에서 중원(中原)으로 다시 나왔을 때로 적고 있다. 왕릉이 형식적으로 패공에게 항복한 때와 실질적으로 패공 밑에 든 때를 각기 달리 적은 것이리라.

고무후 척새와 양후 왕릉을 거두어들인 패공은 다시 동쪽으로 호양(胡陽)을 쳤다. 왕릉에게서 아무 것도 얻지 못한 것을 벌충이라도 하듯 호양성을 털어 군사와 물자를 보탠 다음 다시 서쪽으로 길을 잡았다. 그때 파군(番君) 오예(吳芮)의 별장(別將) 매현(梅현)이 나타나 다시 패공의 세력을 늘여주었다.

파군 오예는 원래 진나라 파양현(番陽縣) 현령이었는데, 그 땅 사람들의 인심을 사 일찍부터 파군이라고 불리며 우러름을 받았다. 진승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도 인심을 업고 일어나니 사방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어 금세 큰 세력을 이루었다. 경포(경布)도 그 중에 하나로, 파군은 특히 그를 기이하게 여겨 사위로 삼았다.

그 뒤 파군은 주로 옛 월(越)나라 사람들을 이끌고 파양호 인근에 자리잡았는데, 매현은 바로 그의 장수였다. 이미 섬기는 주군이 따로 있는 매현이라 투항까지 하지는 않았지만, 패공을 도와 진군이 지키는 성읍(城邑)을 치는 데는 기꺼이 힘을 보태주었다. 게다가 근거지가 남양에서 멀지 않고, 오래 전부터 부근을 오락가락한 터라 그곳의 지리와 인심에도 밝았다. 싸움을 거들 뿐더러 정탐과 길잡이까지 해주니 패공에게 크게 도움이 되었다.

석현(析縣)은 남양군의 여러 현 가운데 하나로 완성(宛城)과 단수(丹水)사이에 있는 현이었다. 성이 굳고 지키는 군사가 적지 않았으나 패공과 매현의 군사들이 힘을 합쳐 들이치니 오래 배겨내지 못했다. 사흘도 안돼 성을 지키던 진군은 서쪽으로 달아나고 성은 패공의 손에 들어왔다.

역현((력,역)縣)은 석현 동쪽으로 남양(南陽) 가까운 곳에 있는데, 원래 패공이 호양에서 무관으로 길을 잡을 때 그냥 지나쳐 온 성이었다. 그러나 석현에서 달아난 진군이 그리로 합쳐 적지 않은 세력을 이루니 그냥 둘 수 없었다. 무관으로 가는 길을 잠시 미루고 들이쳐서 항복을 받았다.

“이제 나는 무관을 지나 관중으로 들어가려 하오. 장군도 나와 함께 관중으로 들어가 함양을 치고 진나라의 숨통을 끊어놓지 않겠소?”

석현과 여현을 치는 동안에 매현에게 은근히 반한 패공이 군사를 무관 쪽으로 돌리며 슬쩍 물어보았다. 그러나 매현은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제게는 모시는 주군(主君)이 따로 계시니. 우선은 파양(番陽)으로 돌아가 주군의 명을 받들어야겠습니다. 뒷날 인연이 닿으면 그때 다시 패공의 명을 받들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서 이끄는 군사와 함께 파군 오예가 기다리는 파양으로 돌아가려 했다. 역이기가 다시 말렸다.

“파군이 몸을 일으킨 것도 천하를 위해서이니 그 뜻이 우리 패공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오. 따라서 패공의 뜻을 받듦이 곧 파군의 뜻을 따르는 것이 될 수도 있소이다.”

“장군이 우리 패공을 따라 공을 세우면 그것은 곧 파군의 공이 될 수도 있소이다. 파군은 곧 파양에 가만히 앉아서 입관(入關)의 공을 나눠 받게 될 것이니, 장군이 그리 한다면 그 또한 주군을 섬기는 도리가 아니겠소?”

장양도 옆에서 거들었다. 그제야 매현도 한참을 말없이 생각하더니 마침내 마음을 바꿔 먹었다.

“그럼 이 길이 파군을 위하는 길이라 믿고 패공을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는 사람을 파양으로 보내 일의 앞뒤를 오예에게 알리게 한 뒤 패공을 따라 나섰다.

뒷날을 보면 역이기와 장량의 말은 거의 그대로 들어맞았다. 오래잖아 항우를 따라 관중으로 들어간 오예는 나중에 항우로부터 형산왕(衡山王)을 받게 되는데, 그것은 그의 별장 매현이 세운 공 때문이었다. 또 항우가 죽은 뒤에는 한(漢)나라부터 장사왕(長沙王)을 받게되는데, 그 또한 매현이 패공을 따라 입관하여 세운 공 덕분이었다.

옛 한나라 땅을 거의 평정하고 세력을 몇 배로 부풀린 뒤에야 패공은 마침내 무관으로 향했다. 무관은 남쪽에서 관중으로 들어가는 거의 하나뿐인 길목이었다. 비록 군사는 10만 대군을 일컬을 만큼 불어나고, 그 뒤를 댈 곡식과 물자도 넉넉하였지만, 그래도 무관이 가까워 오자 패공은 걱정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 동안 싸운 곳은 어쨌거나 진나라 바깥에 있는 땅이었다. 그런데 이제 패공의 군사는 그 진나라의 가슴팍이라 할 수도 있는 관중으로 찔러 들어가고 있었다. 아무리 진나라가 어지럽다 해도 가슴팍을 찔러오는 칼날을 그대로 맞고 앉아 있을 리는 없었다. 적어도 입구가 되는 네 관(關)만은 힘을 다해 막을 것 같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시황제가 천하를 서른여섯 개의 군(郡)으로 나누고 조정에서 바로 내려 보낸 벼슬아치로 다스리도록 바꾸어놓은 게 오히려 우리 앞길을 열어줄 것입니다. 대저 군현제(郡縣制)란 천하가 안정되고 유능한 황제가 법과 제도를 틀어잡고 있을 때는 잘 돌아가지만, 그렇지 않으면 봉건제보다 더 쉽게 무너집니다. 땅을 나눠 받은 왕과 제후는 자신을 위해 그 땅과 백성을 지키지만, 군현에 내려와 있는 벼슬아치는 녹봉을 내려줄 조정이 망하면 그것으로 다스리는 땅과의 관계도 끝나기 때문입니다.”

패공의 속을 헤아린 장량이 그렇게 걱정을 덜어주려 했으나, 무관으로 장졸들을 몰아가는 패공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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