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상영/100년전과 오늘, 그리고 한반도

  • 입력 2003년 12월 31일 17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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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고 슬프도다.…조선은 절박한 재앙을 도리어 알지 못하니 이야말로 처마의 제비가 불붙은 것도 모른 채 아무 근심 없이 즐겁게 지저귀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19세기 말 청나라 사람 황준헌(黃遵憲)은 고종에게 올린 ‘조선책략’에서 제국주의가 판을 치는 국제정세에 어두워 거의 무방비 상태였던 조선을 보며 개탄했다. 당시 지도층이 얼마나 무능했으면 다른 나라 사람이 우리의 안위를 걱정했을까.

얼마 뒤인 1904년 대한제국은 옥죄어 오는 외세의 압박 속에서 새해를 맞았다. 2월 8일 러일전쟁이 터졌고 승기를 잡은 일본의 강요로 2월 23일 한일의정서를 맺으면서 대한제국은 국권 상실의 길로 들어선다. 정확히 100년 전의 일이다.

한 세기가 지난 2004년, 한국은 세계 12위의 경제력을 가진 나라로 성장했다. 100년 전 그때처럼 힘이 약하거나 무력해 보이지는 않는다. 세상 돌아가는 것도 알 만큼 아는 나라가 되었다.

하지만 국민은 불안해 한다. 지도층의 권력 싸움은 100년 전 못지않고 정치자금이란 말로 포장된 부정부패는 상상을 초월한다. 한반도의 명운을 가를 수도 있는 6자회담이 1월, 늦어도 2월에는 열린다. 힘으로 세계를 지배하려는 미국, 우주로 나아가고 있는 중국, 그리고 과거의 영광을 되찾으려는 러시아와 일본이 6자회담에 숟가락을 놓았다. 역사는 반복되는가. 참으로 한 세기 전과 흡사한 상황이다.

9·11테러 이후 강화되고 있는 팍스 아메리카나 체제는 새해에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이라크가 미국에 무릎을 꿇은 뒤 이란은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핵사찰을 받아들였고, 리비아는 대량살상무기 계획 폐기를 선언했다. ‘언제 미국이 공격할지 모른다’는 공포가 그들의 머리를 숙이게 만들었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계질서 속에서 강대국은 약소국에 대해 관용이나 인내심을 갖지 않는다.

이렇듯 국제정세는 과거 어느 때보다 냉혹하다. 이제 북한은 미국에 단 하나 남은 ‘악의 축’ 국가이다. 과거처럼 ‘벼랑 끝’ 전술로 미국의 양보를 얻어낼 수도 없다. 본보가 신년 시리즈로 내보내는 ‘워싱턴의 한반도정책 무버 & 셰이커’(A8·9면 참조)에서 보듯이 미국의 정책을 입안하거나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북한에 대한 공격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돌아가는 한반도 정세는 이렇게 급박하다.

외부에서 자극이 오면 몸 전체가 함께 대응해야 한다. 머리로 하는 생각과 몸의 움직임이 다르고, 손과 발이 따로 놀아서는 자신에게 큰 위기가 닥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내부 결속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지난해와 같은 분열의 정치, 분열의 리더십으로는 외부로부터의 위협에 대처할 수 없다. 밖에서는 한반도를 어떻게 요리할까 갖가지 논의를 하고 있는데 안에서는 권력싸움에 국가적 역량을 소진한 100년 전의 잘못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통합의 정치, 통합의 리더십이 절실하다. 역사적으로 국가적 재난 앞에는 반드시 지도층의 그릇된 상황인식이 있었다.

김상영 국제부장 young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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