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박중현/'배짱연체' 누가 부추겼나

  • 입력 2003년 11월 27일 18시 3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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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가 쓰러지는 건 깃털같이 가벼운 마지막 짐 하나 때문이라더니…. 지난달 신용불량자 구제책이 쏟아져 나와 ‘버티기 고객’이 늘어난 것이 회사에 결정적 타격을 줬습니다.”

현금서비스 중단이란 극단적 상황까지 몰렸다가 채권은행단의 2조원 자금지원 결정에 따라 간신히 살아난 LG카드의 한 임원은 27일 이렇게 탄식했다.

한국자산관리공사는 ‘특별 이벤트 기간’을 정해 신용불량자의 채무액 원리금을 최고 70%까지 깎아줄 계획이라고 10월 중순 밝혔다. 또 국민은행과 산업은행도 구제책을 발표하면서 신용불량자들의 기대감은 갈수록 커졌다.

실제로 자산관리공사의 발표 직후 각 카드사의 연체채권 회수율은 15∼20%가량 떨어졌다. 연체자들에게 빚을 독촉하는 전화가 ‘연결’되는 확률도 9월의 평균 56%에서 20∼30% 수준으로 뚝 떨어졌다.

정부와 금융회사가 신용불량자들의 도덕적 해이(모럴 해저드)를 조장한다는 비판이 커지자 금융감독위원회는 10월 말 금융기관들을 불러 모았다. 금융회사들은 이전보다 탕감 규모를 줄여 발표했다. 그러나 이미 ‘헛바람’이 든 채무자들의 기대를 줄일 수는 없었다.

그 결과가 26일 발표된 신용불량자 수에 고스란히 반영됐다.

10월 말 현재 개인 신용불량자는 한 달 전보다 9만4271명이 늘어나 360만명에 육박했다. “탕감 받을 때까지 버티겠다”는 ‘배짱 연체자’들이 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LG카드 사태 이후 카드업체들의 고객관리 강화가 겹치면서 신용불량자가 조만간 400만명을 넘어설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외상이라면 소도 잡아먹는다’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는 속담이 있다. 경제적 측면의 도덕적 해이는 때로 사람을 ‘극단적 자기 파괴’로 이끌어갈 수도 있다.

신용사회를 주도하는 금융회사들이 이런 기본적 원리를 몰랐을 리 없다. 그런데도 구제책을 경쟁적으로 남발했던 이유가 무엇인지 지금도 납득하기 어렵다. 또 최근 LG카드 사태에서 보여줬던 금융감독 당국의 놀라운 순발력이 왜 당시에는 제때 발휘되지 않았는지도 의문이다.

‘신용불량자’라는 꼬리표 때문에 채무자들을 무조건 매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처해 있는 상황과 빚을 갚으려는 의지 등이 모두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부든, 금융회사든, 개인이든 분명히 명심해야 한다. ‘빚은 갚아야 한다’와 ‘세상에 공짜는 없다’라는 경제학의 기본원칙은 어디에서든 통용된다. 특히 정부와 금융계가 앞장서서 도덕적 해이를 부추기는 일만은 이제 없어야 한다.

박중현 경제부 기자 sanju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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