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복거일/'경계인' 가면뒤에 숨지마라

  • 입력 2003년 10월 2일 18시 37분


코멘트
송두율 교수가 북한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김철수’와 동일인임이 확인됐다고 한다. 아울러 그가 지금까지 받은 혐의들이 대부분 사실임이 드러나고 있다. 혐의들이 워낙 심중하고 그가 그것들을 거세게 부인해 온 터라, 이 사건의 충격은 클 수밖에 없다. 아마도 가장 큰 충격을 받을 사람은 줄곧 그를 옹호해 온 좌파 지식인들일 것이다. 그의 혐의들이 점점 구체화돼도, 그들은 그를 정직하고 균형 잡힌 지식인으로 떠받들었다.

▼좌파 지식인 그릇된 ‘宋씨 감싸기’▼

송 교수를 옹호하는 데 가장 많이 쓰인 말은 ‘경계인’이었다. 그가 공산주의 체제인 북한과 자본주의 체제인 남한 사이에서 방황했다는 얘기다. 두 체제 사이에서 정치적 선택을 해야 했던 사람에게 본질적으로 문화적 개념인 ‘경계인’이란 말을 적용하는 어색한 관행을 받아들이더라도, 그는 분명히 경계인은 아니었다.

소련과 동유럽의 공산주의 체제가 무너지고 북한의 지옥 같은 실상이 알려진 뒤엔, 정직한 해외 한국인들에겐 정치적 선택이 어렵지 않았을 터다. 설령 그들이 이전에 공산주의와 북한에 끌렸더라도 말이다. 1980년대 말엔 남한이 자유롭고 활기찬 사회고 북한은 더할 나위 없이 압제적이고 궁핍한 사회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무엇보다 북한 체제는 개인숭배에 바탕을 둔 세습 왕조로 탈바꿈해 공산주의가 부여하는 최소한의 후광마저 잃었고, 끝없이 이어지는 탈북 행렬은 북한 체제에 근본적 문제가 있음을 가리켰다.

자신의 신념이 틀렸음을 인정하기는 누구에게도 어렵다. 그것은 지적 파산을 선언하는 일이고, 지적 파산은 적어도 지식인들에겐 잘못 산 삶을 뜻한다. 그래서 누구나 자신의 신념이 틀렸음이 드러난 뒤에도 그것을 지키려 애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특히 그러하니, 마르크스주의가 본질적으로 ‘종교적 이념’이므로, 그 추종자들은 대부분 자신의 믿음을 버리기보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길을 고른다.

송 교수의 예상치 못한 자백과 드러난 혐의들은 소리 높여 그를 옹호해 온 좌파 지식인들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북한 권력서열 23위인 정치국 후보위원을 ‘경계인’이라고 우기는 것은 늘 유창한 그들에게도 어려울 터이다.

물론 그들은 잘못을 인정하는 대신 그런 처지에서 빠져나오려 몸을 비틀고 말을 바꿀 터이다. 이미 그들은 그런 재능을 여러 번 보여줬다. 최근의 경우는 북한의 핵무기와 관련한 변신이었다.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자, 그들은 그것이 증명되지 않은 주장임을 줄기차게 지적했다. 북한 당국이 핵무기 보유를 선언하자, 그들은 이내 북한의 핵무기가 미국의 위협에 대한 자위 수단이라는 주장을 폈다.

이제 그들은 깨달아야 한다. 그들의 진정한 잘못은 압제적이고 파산한 북한과 자유롭고 활기찬 남한을 모든 면에서 동등한 체제로 여기는 것임을. 그런 잘못에서 북한의 정권과 주민을 구별하지 못하는 어리석음과 송 교수와 같은 사람을 정직하고 균형 잡힌 지식인으로 높이는 실수가 나왔다.

다원주의 사회를 지향해야 한다는 얘기가 자주 나온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모든 이념들과 견해들이 늘 동등한 대접을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념과 견해는 늘 경쟁하며, 그르거나 비효율적임이 드러난 것들은 폐기된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득세한 좌파 이념은 대부분 현실의 검증을 통해 논파(論破)된 이론과 견해들이다. 1990년대에 이미 그르다고 판명된 이념을 21세기에도 지니려고 애쓰는 것은 현실적으로 고달프고 도덕적으로 옳지 못하다.

▼진실왜곡 반성하고 자아성찰을 ▼

작년에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이 자서전 ‘흥미로운 시절:어떤 20세기 인생’을 펴냈을 때, 한 서평은 “사람은 바보나 악당이 아니면서도 정치적으로 틀릴 수 있다”고 말했다. 우리 사회의 좌파 지식인들은 이제 진지하게 성찰해야 한다. “나는 바보도 악당도 아닌데, 어째서 내 주장은 늘 틀리는가? 그것도 북한 당국이 나서서 틀렸음을 밝히는가?” 그것이 송 교수를 ‘경계인’이라고 옹호해서 시민들을 오도한 잘못을 조금이나마 씻고 앞으로 그런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않는 길이다.

복거일 소설가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