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영균/'내년 수해' 지금 대비를

  • 입력 2003년 9월 17일 18시 2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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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사람이 더 걱정이다. 거의 매년 되풀이되는 태풍인데 예방도, 대피도 제대로 못해 또 100명이 넘는 사람이 숨을 거두었다니 안타까운 일이지만 산 사람마저 스스로 목숨을 끊을까 봐서 그렇다.

지난해 태풍 루사가 휩쓸고 지나간 뒤 망연자실한 이재민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이재민들이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것은 장차 살아갈 길이 막연하기 때문이다.

정부가 지원하는 복구비나 보상금이 턱없이 모자라는 게 현실이다. 그나마 제때 지급되지도 않는다. 겨울이 다 되어서야 보상금이 나왔다고 하니 하면 아직도 컨테이너에서 생활하는 사람이 있다. 이재민들이 얼마나 허탈한 심정일지 짐작이 간다.

부실 늑장 지원의 원인은 재원이 부족할 뿐 아니라 정부의 준비부족과 즉흥적인 대응에 있다. 올해도 마찬가지다. 정부는 이번에도 추경예산을 짜고, 예비비 1000억원을 우선 배정할 계획이라고 서둘러 발표했다.

수재의연금으로 사망 및 실종자 1000만원, 부상자 500만원, 주택 전파(全破) 380만원씩 위로금을 지급한다지만 이 정도로는 재기하기 힘들다.

더군다나 애써 지은 농작물의 피해는 보상받을 길이 거의 없다. 재정 빈곤을 핑계로 차일피일 미루던 농작물 보험을 3년 전부터 농협이 시행하고 있지만 너무 미흡하다. 사과 배 등 일부 과일만이 보험의 대상이 될 뿐이다.

보험료도 다른 보험에 비해 비싼 편이어서 농가에서 선뜻 보험을 들기도 어려운 형편이다. 큰 재해가 발생하면 피해가 크기 때문에 농협이 감당하기도 어렵다. 작년에는 보험료 수입은 80억원인데 보험금으로 350억원이나 지급돼 재보험회사에서도 외면당하고 있다. 농협이 알아서 하라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보상이라는 게 형식적이다. 피해를 딛고 일어서기에는 턱없이 모자라 재기하려는 의지조차 꺾어버리기 십상이다.

선진 부국인 미국도 한때 적십자사의 수재의연금에 의존한 적이 있다. 1927년 미시시피강 범람 때 수재의연금을 거두었으나 이후 재난구호법이 마련됐고 1980년에는 농작물보험이 도입돼 정부 지원으로 적은 보험료만 내고 자연재해 피해를 보상받을 수 있게 됐다. 요즘엔 선진 금융시장을 이용하고 정부보험과 민간보험을 통해 보상하려는 시도가 활발하다.

일본은 재해채권을 발행해 보상재원을 마련하고 있다. 적은 액수의 채권으로 조금씩 나누어 대비하고 있는 것이다. 국민이 수재의연금을 낼 돈으로 재해채권을 사는 방식이다.

우리보다 못산다는 멕시코도 농업재해 전담 보험회사에서 자연재해 피해를 보상해 줄 정도다. 이에 비하면 우리의 재해대책은 후진적이다. 이제 우리 정부도 생각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 별 준비 없이 지내다가 재해가 터지면 대통령이 “복구에 최선을 다하라”고 지시하거나 추경편성과 수재의연금으로 막아 보려는 임기응변식 발상은 버려야 할 때다. 복구와 보상 체계를 갖추려면 지금부터 내년 태풍을 대비해야 한다.

천재지변은 하늘의 뜻이니 어쩔 수 없다는 식의 사고방식에서도 벗어날 필요가 있다. 자연재해로 피해를 본 국민을 돌보고 보상하는 일은 국가가 해야 할 당연한 일이다. 피해자들이 재기할 수 있도록 국가가 앞장서야 한다. 치산치수(治山治水)는 예전부터 통치자의 몫이었다. 자연재해 때문에 국민이 삶을 포기하게 내버려두는 정권은 자격이 없다.

박영균 경제부장 parky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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