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오명철/어른대접

  • 입력 2003년 9월 5일 17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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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이면 언론사에서는 어른을 찾아 나선다. 송년 및 신년 대담 후보를 고르는 것이다. 그러나 마땅한 어른을 찾기가 생각처럼 쉽지 않다. 지성이 있으면 현실감각이 부족하고, 경륜이 있으면 참신성이 떨어지며, 비판정신이 있으면 세상 돌아가는 복잡한 이치를 잘 모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김수환 추기경이나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 법정 스님 같은 분들이 무난한 후보로 떠오른다. 하지만 세 분은 한사코 인터뷰를 고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열반하신 조계종 성철 종정은 생시에 “나를 친견하려면 3000배를 하고 오라”고 해 기자들을 곤혹스럽게 했다.

▷장유유서(長幼有序)의 전통이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한국에서 이처럼 존경받는 어른을 찾기 어렵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은 우리 현대사가 유난히 굴곡과 좌절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지난날 독재정권은 나름대로 이름을 지켜온 각계의 인재들을 데려다 정권의 정통성 확보에 활용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각 분야에서 상당한 업적을 남긴 인사들도 ‘어용(御用)’이란 비판을 들으며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게 된 경우가 적지 않다. 한국 사회가 지나치게 완벽한 어른을 기대하고 있다는 견해도 있다. 예수님과 부처님도 한국 사회에서 활동했더라면 어른 대접을 받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나이와 자리가 어른을 만들어주는 것은 물론 아니다. 나이가 많다고 해서 모두 어른일 수는 없으며, 벼슬이 오른다고 해서 인품과 실력이 그에 비례해 높아지란 법도 없다. 나잇값을 못하는 노인이 수두룩하고, 고관대작이지만 사람 됨됨이와 언어구사는 시정잡배만도 못한 이도 허다하다. 금아 피천득 선생 같은 분은 올해 93세이지만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하신 반면, 요즘 잘 나간다는 386세대 중에는 이미 노회(老獪)한 ‘애늙은이’들이 적지 않다.

▷노무현 대통령이 엊그제 청와대에서 열린 5자회동에서 한나라당 최병렬 대표로부터 “대통령은 나라의 어른이다. 어른답게 행동해야 한다”는 말을 듣자 “언제 어른 대접해 주었느냐”고 되받았다고 한다. 어느 쪽 말이 옳고 그르건간에 듣기 민망한 소리다. ‘어른다운 행동’이나 ‘어른 대접’은 말로 되는 게 아니다. 몸에 담겨져야 하고 마음에서 우러나야 되는 일이다. 그것을 모르고선 행동도 대접도 기대할 수 없는 노릇 아닌가. 노 대통령이 야당뿐 아니라 온 국민으로부터 ‘나라의 어른’ 대접을 받고, 야당도 대통령으로부터 ‘거대 야당’ 대접을 받는 정치가 복원되기를 바랄 뿐이다.

오명철 논설위원 osc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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