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 卷三. 覇王의 길

  • 입력 2003년 9월 4일 18시 2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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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武信君은 죽고(3)

하룻밤 사이에 열 살은 더 먹어버린 듯 어른스러워진 항우가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데 패공 유방이 부른 듯 달려와 말했다.

“장군, 아무래도 동쪽으로 돌아가야겠소. 우리 두 사람 합쳐봐야 3만도 안되는 군사로 한창 기세가 오른 장함의 10만 대군과 부딪히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오. 우리 모두의 근거지가 되는 동쪽으로 돌아가 흔들리는 민심부터 가라앉히는 게 어떻겠소? 듣기로 지금 팽성(彭城)은 비어있는 성이나 다름없다 하오. 그쯤에 자리잡고 힘을 기른 뒤에 다시 서쪽으로 밀고 나오는 것이 순리일 듯 싶소.”

항우가 알기에도 패공은 그리 말주변이 좋고 정밀하게 이치를 따지는 사람이 아니었다. 틀림없이 곁에 있는 누가 일러준 것일 터이지만, 제법 조리 있게 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패공의 그같은 말에 항우는 내심 반갑기 그지없었다.

한 장수로서 항우의 헤아림은 진작부터 잠시 물러나 군사를 추스린 뒤에 다시 장함과 싸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처럼 따르던 계부(季父)를 참혹하게 잃은 원한에 사무쳐 있는 데다, 싸우지 않고 물러남으로써 사졸들에게 약한 꼴을 보이게 되는 게 싫어, 아직 그 말을 입밖에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패공이 나서서 대신해주고 있지 않은가. 이에 항우는 겉으로는 비분(悲憤)에 차 금세라도 장함을 찾아 나설 듯하다가, 한참 뒤에야 못이긴 척 유방의 말을 받아들였다.

“내 원래는 강동(江東) 형제들과 더불어 일당백(一當百)의 기개로 싸워 장함과 자웅을 겨루어보고 싶었오. 허나 패공께서 그렇게 간곡히 말씀하시니 따르지 않을 수가 없구려. 그럽시다. 우리 잠시 동쪽으로 돌아갑시다. 가서 숨을 고른 뒤에 다시 돌아와 작은 아버님의 원수를 갚읍시다.”

그리고 장수들을 모두 자신의 군막으로 불러모아 말했다.

“나는 패공의 뜻을 받아들여 함께 동쪽으로 물러나기로 했소. 따로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 여신(呂臣) 장군에게도 전갈을 보내 우리와 함께 가도록 하는 게 좋겠소.”.

그렇게 논의가 정해지자 서쪽으로 나와있던 초군(楚軍) 별동대(別動隊)의 다음 움직임은 은밀하면서도 날렵하기 짝이 없었다. 항우와 유방, 여신이 이끄는 세 갈래 초군은 그 밤으로 진채를 뜯어 소리 없이 진류(陳留)를 떠났다. 그리고 큰길을 피하고 굳은 성은 길을 돌아 병력을 고스란히 보존한 채 팽성으로 물러났다.

뒷날 서주(徐州)라 불리우게 되는 팽성은 사수(泗水)평야 한 가운데 자리잡은 오래된 성읍(城邑)이었다. 고양씨(高陽氏) 전욱(전頊)의 현손(玄孫)으로 800살까지 살았다는 팽조(彭祖)가 요(堯)임금으로부터 봉토로 받았다는 대팽(大彭)이 바로 팽성이라고 하는데, 춘추시대에는 벌써 초나라에서도 손꼽을 정도로 크고 번성했다. 풍부한 농수산물의 집산지이자 수륙(水陸) 교통의 중심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팽성은 옛 초나라로 보아서는 다소 북변으로 치우쳐있는 곳인데도 진승이 봉기한 대택(大澤)에 가까워서인지 진작부터 진나라의 굴레를 벗어났다. 장함이 대군을 이끌고 와 진나라가 기세를 회복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진군은 진승을 죽이고 진현(陳縣)을 비롯한 여러 곳 봉기군의 근거지를 우려 뽑았지만, 아직 팽성을 되 거둬들일 엄두는 내지 못하고 있었다.

팽성은 유난히 저항이 거센 초나라 유민들이 몰려 사는 데다 사방으로 열려있는 지세(地勢)였다. 설령 싸워서 되찾는다 해도 어지간한 군사로는 지켜내기 어려웠다. 패공 유방이 평성을 비어있는 곳이나 다름없다고 한 것은 바로 그런 형세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팽성으로 돌아온 항우는 성 서쪽에 자리잡아 스스로 진군(秦軍)을 막는 최전선이 되었다. 또 여신은 군사들과 함께 팽성 동쪽에 자리잡게 하여 적이 오면 호응할 수 있게 하고, 유방은 멀리 탕(탕) 땅에 머물러 북변을 지키면서 서로 의지하는 형세를 [기각지세]를 이루도록 하였다. 그 모든 배치를 주도하여 팽성을 안정시킨 항우는 다시 패공 유방과 장군 여신을 불러 의논하였다.

“이왕에 초나라를 되살려 회왕(懷王)을 모셔놓고, 우이(우貽)같이 멀고 궁벽한 곳에 머무시게 하는 것은 아무래도 온당치 않은 듯하오. 군사도 없이 나약한 문신들에게 맡겨 우이에 이대로 내버려두었다가 무슨 변고라도 있으면 그보다 더한 낭패가 없을 것이오. 차라리 이 팽성을 도읍으로 삼고 우리 대왕을 이리로 모시는 게 어떻겠소?”

유방과 여신이 보기에도 그렇게 하는 게 옳아 보였다. 굳이 마다할 까닭이 없어 고개를 끄덕이자 항우는 그날로 사람을 우이로 보내 회왕과 회왕을 모시는 문신들을 모두 팽성으로 옮겨오게 했다.

항우가 회왕을 팽성으로 모셔오면서 뜻했던 바는 그 과정을 통해 계부(季父) 항량이 가졌던 권한과 지위를 자연스럽게 이어받는 데 있었다. 그런데 회왕과 그를 둘러싼 문신들을 데려다 놓고 보니 일은 전혀 뜻 같지 못했다.

회왕 웅심(熊心)은 이미 지난날 민간(民間)에서 어렵게 찾아냈을 때의 그 순진한 양치기 젊은이가 아니었다. 원래도 미욱하고 막힌 사람이 아니었지만, 몇 달 그를 둘러싼 조신(朝臣)들에게 닦이고 깨여서인지, 제법 술수와 책략에 재미를 붙여가고 있는 눈치였다. 게다가 그 사이 임금노릇에 맛까지 들여 이제는 스스로 임금 티를 내려고 들었다.

그를 둘러싼 옛 초나라 공경(公卿) 출신의 문관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리저리 떠도는 삶에 지쳐 어디든 배나 곯지 않고 머물 수 있으면 그걸로 만족하던 유민(流民)의 무리는 이제 없었다. 대신 어느새 기세를 회복하고 제 자리를 굳힌 한 무리의 총신(寵臣)들이 옛날에 못지 않게 거들먹거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항량이 민간의 양치기에서 찾아 세울 때만 해도 이름뿐이던 왕과 처음 꾸밀 때만 해도 흉내뿐이던 조정은 서로가 서로를 업고 자라, 이제는 양쪽 모두 엄연한 실체로서 아직 제대로 자리조차 잡지 못한 초나라의 새로운 상층부를 이루고 있었다.

“무신군의 죽음은 실로 가슴 아픈 일이나 그 때문에 상하(上下)의 의기가 꺾이는 일이 있어서는 아니 되오. 내 듣기로 쇠는 때릴수록 단단해지고 사람은 간난(艱難)을 겪을수록 굳세어지는 법이오. 우리 모두 어려울수록 서로 힘을 합쳐야 하오. 장군도 죽은 무신군의 뜻을 저버리지 말고 초나라와 이 몸을 위해 애써주시오.”

회왕이 제법 위엄에 찬 얼굴로 그렇게 당부하면서 슬며시 항우의 병권(兵權)까지 거두어갈 때는 그저 아연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아연해할 일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그 무렵 마침 옛 위나라 공자 표(豹=위표)가 진나라와 싸워 위나라 땅의 성 스무 남은 개를 되찾았다고 알려왔다. 그러자 회왕은 한번 머뭇거리는 법도 없이 위표(魏豹)를 위왕(魏王)으로 봉했다. 회왕을 세운 것은 죽은 계부 항량이었건만, 반년도 안되는 사이 회왕은 커질 대로 커져 그 권위가 한창 때의 진왕(陳王=진승)에 못지 않았다.

뒤이어 회왕은 또 논공행상이랍시고 문관들을 시켜 속 빈 강정 같은 벼슬놀음을 시작했는데, 항우로 보아서는 그 내용이 아주 고약했다.

“패공 유방은 탕군장(탕郡長)으로 삼고 무안후(武安侯)에 봉하며 탕군의 병마를 이끌게 한다. 장군 항우는 장안후(長安侯)로 삼고 노공(魯公)이라 부르며, 장군 여신은 사도(司徒)로 삼고 그 아비 여청(呂靑)은 영윤(令尹)으로 삼는다.”

초나라의 주력(主力)이라 할 수 있는 군사를 거느린 그들 세 사람에게 대강 그렇게 벼슬과 작위를 내렸는데, 그래도 은근히 기대하고 있던 항우에게는 실로 분통터지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항량의 뒤를 잇게 하기는커녕 유방이나 여신보다도 나을 것이 없는 봉작(封爵)이었기 때문이었다. 따로 군사를 거느리게 한 점에서는 유방만 못하고, 별로 세운 공도 없는 그 아비까지 재상(영윤)으로 높인 것을 따지면 여신보다도 못했다.

회왕이 서쪽으로 군사를 이끌고 가서 진나라를 치는 일을 패공 유방에게만 맡긴 것도 항우의 심기를 크게 건드렸다. 도읍을 팽성으로 옮기고 나라가 안팎으로 안정이 되자 여유가 생긴 회왕은 여러 장수들을 불러놓고 공언했다.

“누구든 먼저 관중(關中)으로 들어가 진나라를 무찌르고 그곳을 평정하면 그를 관중왕(關中王)으로 삼을 것이오!”

관중은 함곡관(函谷關)에서 서쪽, 산관(散關)에서 동쪽, 소관(蕭關)에서 남쪽 무관(武關)에서 북쪽에 있는 땅을 말하는데, 통상으로는 함곡관 서쪽의 진나라 중심부를 가리킨다. 하지만 그때는 진나라가 꺼지기 전에 한번 더 타오르는 불꽃처럼 거세게 반격을 해오고 있던 때였다. 한 싸움으로 항량을 죽인 장함이 대군을 이끌고 북쪽으로 밀고 들어 진나라에 맞서 일어난 제후들을 차례로 몰아대고 있는 판이라, 초나라 장수들은 기가 몹시 죽어있었다. 아무도 아직은 강성한 진나라의 주력이 버티고 있는 관중으로 앞장서 들어가기를 이롭게 여기지 않았다.

그때 항우가 나섰다.

“서쪽으로 진나라를 쳐 없애는 일이라면 저와 패공이 한번 나서 보겠습니다. 반드시 함곡관을 두들겨 부수고 관중을 평정해 조상의 한을 풀겠습니다.”

오직 항우만이 진나라를 두려워하지 않은 것은 진나라가 할아버지 항연(項燕)과 아버지 항숙(項叔)을 죽게 했을 뿐만 아니라, 이제 다시 계부 항량을 죽여 원한에 사무쳐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패공 유방을 끌고 들어간 것은 그때까지만 해도 항우가 그만큼 패공을 가깝고 미덥게 여겼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회왕은 그같은 항우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이런 저런 핑계를 대 항우는 기어이 팽성에 잡아두고 패공 유방에게만 서진(西進)을 허락했다.

“무안후는 탕군(탕郡)의 군병을 이끌고 서쪽으로 나아가라. 진왕(陳王)을 따르던 세력과 항량 밑에서 싸우다가 흩어진 장졸들을 다시 불러 모으면 적지 않은 군세(軍勢)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을 이끌고 관중으로 들어가 무도한 진나라를 쳐 없애도록 하라!”

항우에게는 맞대놓고 하는 모욕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도 놀랍게도 항우는 그 일을 참아 넘겼다. 오히려 걱정이 된 것은 항우 편에 서지 않은 다른 장수들이었다. 그래도 항량이 살아있을 때의 위세를 기억하고 있을 뿐더러, 항우의 불같은 성정(性情)도 겪어서 잘 아는 그들은 가만히 회왕을 찾아가 물었다.

“대왕께서는 어찌하여 항우의 뜻을 들어주지 않으셨습니까? 군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가서 진나라를 쳐 없앨 장수로는 항우만한 이도 없지 않습니까? 게다가 할아비, 아비에 이어 자기를 아들같이 길러준 아재비까지 잃은 원한도 항우에게는 큰 힘이 될 것입니다.”

그러자 회왕이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것처럼 길게 대답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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