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삶]한승원/바닷가 모래城 같은 인생들

  • 입력 2003년 8월 29일 17시 5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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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깨 수박 참외 콩 따위의 밭작물들은 장맛비로 이미 다 녹아 버렸다. 농부들은 논농사에 가느다란 희망을 걸고 있는데, 아침저녁으로 차가운 바람이 불고 한낮에는 늦더위가 기승을 부려야 하는데, 여름 내내 장마로 말미암아 일조량이 부족하므로 곡식을 익히기 위해 바야흐로 폭서와 폭염을 쏟아놓고 있어야 하는데 다시 며칠 동안 지긋지긋한 폭우가 쏟아졌다. 다행히 오늘 아침부터는 비구름이 사라졌고, 푸른 하늘이 드러났다.

여느 아침이나 마찬가지로 논둑을 걸어서 바다에 이른다. 바야흐로 벼이삭이 패고 있다. 바다에는 별로 높지 않은 파도와 갈매기 떼가 한가롭다. 물놀이하러 온 사람들이 울긋불긋한 천막을 친 자리에는 통보리사초와 갯메꽃 줄기들만 무성하다. 한밤에 주꾸미잡이를 하기 위해 수천 개의 소라껍데기를 매단 줄을 싣고 나갔던 어부들의 배가 들어오고들 있다. 닻을 던진다. 닻에 두들겨맞은 물방울들이 순 은빛 햇살을 되받아 튕기며 날아간다. 아침해의 광망을 등지고, 머리를 끄덕거리는 빈 배를 등지고 고기잡이 부부는 물로 내려서서 모래밭으로 걸어나오고 있다. 아내는 머리에 주꾸미가 들어 있는 함지박을 이고 있다.

전날 저녁 무렵에 수산연구소장이 전화를 걸어 왔다. 적조 피해 현장엘 가보지 않겠느냐고. 황토 뿌리는 것을 직접 보면 좋은 생각이 떠오를지도 모른다고.

적조는 양식장의 고기와 조개들의 아가미를 막아 질식하여 죽게 만드는 불그죽죽한 색깔의 미생물이다. 아내에게 적조 이야기를 하자 “우리 바지락도 다 죽겠네” 하고 말했다. 지난해 봄 아내는 7만원어치의 치패를 사다가 큰 사람의 엉덩짝만 한 자기 소유의 밭에 뿌렸던 것이다. 남의 염병이 내 고뿔보다 못한 법이다.

농부와 어부들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기상이 잘 되도록 도와 주어야만 잘 살 수 있다. 어찌 농부나 어부들뿐이랴.

모래밭으로 들어서자마자 몸의 균형을 잃는다. 비틀거리며 걷는다. 모래 속으로 구두 발바닥이 깊이 묻히곤 하는 까닭이다. 몸이 옆으로 기울어지곤 하는 것을 즐긴다. 비틀거리는 몸의 균형을 바로잡으며 걷는 일은 항상 나로 하여금 살아 있음의 환희를 느끼게 한다. 아무도 밟지 않아 편편한 모래밭을 걸어가다가 뒤돌아 내 발자국을 돌아보는 것도 즐거움이다. 적조 피해로 고기들이 떼죽음하는데 모래밭을 즐기는 것이 미안스럽다.

간밤 밀물이 밀어다가 놓은 조개껍데기들을 밟아 뭉개지 않고 피해 간다. 하루 전날 밤의 밀물이 밀어다가 놓은 조개껍데기들이 2m쯤 위쪽에 널려 있다. 그 위에 이틀 전 밤과 사흘 전 밤의 물자국들이 놓여 있다. 그 물자국들 사이사이에 물떼새들의 자잘한 발자국들이 상형문자처럼 새겨져 있다. 해류와 바람의 시간과 우주의 시원으로부터 달려온 모래알들의 시간과 물떼새들의 시간이 삼중으로 교직되어 있다. 그 위에 나의 시간이 사중으로 교직된다. 3년 전 여름의 어느 날 나는 누군가가 ‘삶은 산처럼 무겁고 사랑은 새털처럼 가볍다’고 써놓은 낙서를 읽은 적이 있다. 이후로 나는 아침 산책을 할 때마다 간밤 누구인가가 또 무슨 낙서를 하고 가지 않았을까 하고 살피곤 한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바다를 등져야 하는 모래밭 끝부분에 이르러 희한한 모래성을 발견했다. 지름 3m쯤의 타원형 성벽. 소라껍데기로 성가퀴들을 표현해 놓았다. 남쪽에 성문이 있고, 성 한가운데에는 왕궁이 있고, 양쪽에 별궁이 둘 있다. 그것들의 지붕은 바지락껍데기로 덮었다. 별궁 앞에는 탑도 만들어 놓았다. 층층이 납작한 돌을 올려 만든 탑 꼭대기에 반질반질하게 닳은 고둥껍데기를 올려놓았다.

성은 며칠 뒤의 사리 때 만조가 되면 흔적도 없이 지워져 버릴 장소에 건설되어 있었다. 그 성 앞에 서서 그것을 만들었을 사람들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렸다. 농로를 따라 집으로 돌아가며 생각했다. 나는 태어난 이래 어떤 모습의 모래성을 쌓고 있는 것일까.

▼약력 ▼

작가. 서울에 사는 동안 심한 위장병으로 고생하다가 1997년 고향인 전남 장흥으로 돌아가 바다와 산과 더불어 생활하고 있다.

한승원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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