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송영언/정치개혁, 시간이 없다

  • 입력 2003년 8월 26일 18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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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대통령선거가 끝난 후 여야는 한결같이 정치개혁을 다짐했다. 그러나 지금 그 다짐들은 강도(强度)가 크게 약해졌다. 민주당은 개혁안 논의는 뒷전으로 미룬 채 신당싸움에 바쁘고, 한나라당은 당 정치발전특별위원회를 가동하긴 했으나 정치개혁의 본질에는 접근조차 못하고 있다. 국회 정치개혁특위도 이따금 회의를 열긴 하지만 본론은 제쳐두고 게으름만 피우고 있다.

각 정당이나 국회 정개특위가 정치개혁에 소극적인 가장 큰 이유는 현역 의원이 누리는 기득권의 달콤함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일 것이다. 겉으론 정치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속으론 현행 제도로 선거를 치르는 게 더 유리하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달 말 국회 정개특위 회의록을 읽어보니 그런 속내가 드러난다. ‘(농촌선거구의 경우) 인구기준을 더 상향시킨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정치적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K의원) ‘의원 수를 늘리는 것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P의원)….

정치개혁의 핵심은 이런 것들이 아니라 정치자금의 투명화와 돈이 많이 드는 지구당제도의 개선, 신진 인사의 진입장벽 철폐 등이다. 특히 정치자금의 경우 일정액 이상의 수표사용 의무화, 수입 지출의 단일계좌 사용, 고액기부자의 실명 공개 등이 필요하다. 정치자금의 규모를 줄이되 그 이동경로와 회계처리를 유리창처럼 들여다볼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최근 불거진 ‘굿모닝게이트’와 현대비자금 사건은 ‘돈 정치’의 폐해를 다시 한번 드러냈다. ‘검은돈’과 이에 따른 정경유착의 청산 없이는 어떤 개혁도 의미가 없다. 때만 되면 정치인에게 손을 벌리는 유권자의 의식개혁도 이와 맞물린 과제다.

정치개혁을 국회 정개특위 등 정치권 자율에 맡겨서는 백년하청(百年河淸)일 수밖에 없다는 게 우리의 경험이다. 개혁 대상이 개혁에 나서는 것 자체가 모순 아닌가. 실제로 정개특위는 구체적 활동방향과 일정을 정리한, 요새 말로 그 흔한 로드맵 하나 없다. 정개특위에 정치개혁을 맡겼다간 이번에도 마냥 시간만 보내다 선거에 임박해 여야간 정치담합으로 끝낼 공산이 크다. 더욱이 이 특위에는 선거구 조정에 이해관계가 있는 의원들도 포진해 있어 오히려 개악(改惡)의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해법은 분명하다. 여야 대표가 이미 합의한 대로 정치권 및 학계 언론계 시민단체 대표 등이 함께 참여하는 범국민정치개혁특위에서 정치개혁을 논의하고, 여야가 여기서 도출되는 안을 조건 없이 수용하면 된다.

내년 총선 출마를 위해 전국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뛰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과연 진정한 의미의 상향식 공천이 이루어지긴 하는지, 선거구는 어떻게 조정되고 돈은 어떻게 써야 하는지 막막하기만 하다고 호소한다. 룰이 어떻게 될지도 모른 채 경기에 뛰어든 어지러운 상황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17대 국회의원 선거일은 내년 4월 15일이다. 8개월도 채 남지 않았다. 마침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자체적인 정치관계법 개정안을 마련해 오늘 국회에 제출한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범국민정치개혁특위가 구성돼 정치개혁 작업이 본격화되기를 기대한다. 더는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송영언 논설위원 younge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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