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욱 칼럼]KBS특별기획 역사왜곡 너무해

  • 입력 2003년 8월 26일 14시 4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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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욱 前동아일보 회장
이동욱 前동아일보 회장
역사왜곡 너무해

지난 16일 오후에 방영된 KBS 1TV의 특별기획 (일제하 민족언론을 해부한다)는 프로는 사뭇 충격적인 것이였다. 공영방송 KBS가 이토록 역사를 왜곡할 수 있을까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일제하 총독통치가 동아, 조선을 강제 폐간시킨 것을 정당화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프로는 1940년 당시 동아, 조선 등 민족지의 강제 폐간을 1944년의 일본에서의 패전직전 신문용지 부족에 의한 신문정비와 같은 맥락에서 진행된 것인양 꾸며졌으며 동아, 조선 등 민족지의 폐간진상을 철저히 외면했을 뿐만 아니라 동아, 조선이 이에 고분고분 순응한 것처럼 묘사한 것은 역사를 송두리채 왜곡한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일본에 비유한건 무리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 미국, 영국, 중국등과 싸워서 폐전하기 직전 1944년에 쥬가이쇼교신문과 고교신문을 합병해서 니홍게이자이신문이 되었으며 지방의 분소 신문들을 통폐합하면서도 아사히, 마이니찌, 요미우리 등 큰 신문에 대해서는 손을 대지 못했고 이는 신문용지 부족이 극심했기 때문에 그러한 신문정비가 불가피했었던 것이다.

그런데 동아, 조선이 강제폐간됐던 때 1940년은 미,일 전쟁이 터지기 2년전이어서 신문용지 부족이 심한 때가 아니었으므로 일본에서는 신문용지 배급 같은 것은 없었고 한국에서만 동아,조선 등 민족지 탄압용으로 신문용지 배급통제를 강행했던 것인데 동아,조선을 강제폐간하고 한국말 신문이라고는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만을 남겨놓은 것을 마치 일본에서의 쥬가이신문과 고교신문을 합쳐서 니홍게이자이신문을 만들었던 신문정비와 모양새가 비슷하게 보이도록 한 KBS의 그 프로는 이만저만한 역사왜곡이 아닐 수 없다.

kbs의 그 프로가 역사를 정당하게 묘사한 것이 아니라고 단정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앞서 말한 것 말고도 여러가지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동아, 조선의 폐간진상을 철두철미 외면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폐간진상 철저외면

그 프로에서 민족언론 탄압이 1938년 부터 검토됐다고 한것만은 정확한 지적이다. 당시의 백관수 동아일보 사장이 총독부 경무국장의 동아일보 폐간요구를 거부한 1938년 부터 동아 폐간압박은 본격화되었기 때문이였다.

한번 더 여기에서 짚고 넘어 가야할 것은 앞서 kbs가 방영한 내용과는 달리 신문용지 배급은 일본에서 보다 한국에서 3년이나 먼저 강행된 것이다. 1940년에 접어들면서 총독부는 아예 동아, 조선에 신문용지 배급을 중단했다. 그러나 동아와 조선은 신문을 계속 찍으려니까 부득이 암시장에서라도 신문용지를 구입하지않을수 없었다.

따라서 그것이 빌미가 되어 동아의 김승문 영업국장등 관계 사원들이 경제사범으로 몰려 구속되는 등 폐간으로의 탄압은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는데도 동아, 조선은 계속 찍어내기만 하니까 경무국은 드디어 동아일보의 중요 주주들을 귀거리, 코거리 식으로 종로 경찰서에 잡아 가두고 그곳에서 주주총회 아닌 주주총회를 강제로 열게 하고 동아일보 폐간결의안에 만장일치 아닌 만장일치의 찬성을 강요해서 마침내 동아일보는 창간 20년을 일기로 일시 신문발행을 중지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이미 다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KBS의 그 프로는 동아일보가 그토록 혹독함 속에서 살아남으려고 안간힘을 다 하다 쓰러진 그 처참한 모습을 철두철미 외면한채 4년후에 일본에서 신문용지 부족 때문에 진행되었던 신문정비에 비긴 모양새로 편집한 것은 총독통치의 잔학상을 오히려 미화한 것 처럼 느껴지게 한다.

눈물 흘릴 자유도 없었다

그리고 그 프로는 동아, 조선의 폐간사의 내용이 의외로 담담함에 놀란척하면서 진짜 민족지라면 민족지의 억울한 최후를 슬퍼하는 폐간사였어야 했을터인데 그렇지 못함을 냉소조로 묘사했다. 도대체 사람이 죽을때 그 임종을 슬퍼하지않을 자가 어디에 있겠는가. 동아일보가 폐간 당하던 그날, 그 임종을 지켜보면서 울지않은 동아일보 사원이 단 한명이라도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지금도 당시의 동아일보 폐간사를 통해서 울면서도 눈물 흘릴 자유까지 빼앗긴 시대와, 그래서 보이지않는 눈물과 들리지 않는 통곡을 들을 수 있다. 일제하 민족지의 역사는 혹독한 총독통치의 모진 매를 맞으면서도 「아야!」 소리도 낼 자유마저 없었고, 일제하 동아와 조선의 역사는 압수, 판매금지, 정간의 잇따른 기록이며 이것이 총독통치의 혹독함을 증명하는 것이다.

동아·조선의 게릴라식 투쟁 이해해야

물론 민족지도 기업이기에 수지채산을 맞추지 못한다면 쓰러져서 민족의 소리를 대변하지 못했을 것 아닌가. 따라서 적어도 압수, 판매금지, 정간 등을 피하거나 최소화하려고 노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총독통치의 탄압과 정면대결한다는것 자체가 무모한 것이므로 부득이 면종복배하면서 게릴라식로라도 투쟁할 수 밖에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일본의 천황의 사진을 크게 실리지 않을 수 없었고 전쟁 기사를 다룰 때 일본군을 일본군이라고 쓰지말고 「아군」이라고 칭하라는 총독부의 끈질긴 고집을 꺽지 못해「황군」으로 타협하는 것 등의 수모를 피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민족의 소리를 모기소리 만큼이라도 대변하고자 할찐대 이는 불가피한 타협이였으며 부득이한 수모가 아닐 수 없는 것이었다.

물론 그렇다고해서 민족지들의 그러한 흠들을 가감없이 그대로 지적하는것마저 마다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그러한 흠들을 견강부회하여 민족지를 친일지로 매도하는 것는 선의에 의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이 동 욱 (언론인·前동아일보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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