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동관/정치인들의 용기있는 '참회'

  • 입력 2003년 8월 24일 18시 1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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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정권 초기인 98년 여름. 대통령선거 패배로 졸지에 야당으로 전락한 한나라당의 한 변호사 출신 초선의원(현 재선의원)은 필자에게 다음과 같은 푸념을 늘어놓은 일이 있다.

“들어와 보니 정치판이 바로 ‘화류계’더군요. 한번 들여놓으면 발을 뺄 수 없는 데다 의원이 되고 난 후엔 ‘공짜’로 해달라는 민원만 늘어 변호사 사무실도 겨우 유지할 판입니다. 돈 마련하느라 뛰어다녀야 하는 신세가 한심해 그만두고 싶지만 ‘도태됐다’는 소리가 듣기 싫어 악으로 버티는 겁니다.”

그는 특히 다시 돌아가도 ‘정치판을 기웃거렸다’는 전력 때문에 법조계에서 백안시 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화류계’론의 또 다른 근거로 지적했다.

그의 자탄처럼 굴곡 심한 우리 정치지형 속에서는 때로는 정치인이라는 사실 자체가 태생적 원죄(原罪)처럼 멍에로 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게 최근의 상황이다.

더욱이 경선자금을 양심고백했다가 최근 1심 재판에서 500만원의 벌금형을 선고받은 민주당 김근태(金槿泰) 의원의 경우처럼 용기 있는 고백이 때로는 치욕이 돼 돌아오기도 한다. 본보가 연재 중인 ‘정치인 참회록’ 취재에 응했던 정치인들에게 “용기 있다”는 찬사와 함께 “정치인의 치부를 팔아 개인의 인기를 얻으려 한다”는 비난이 나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우리 정치판이 이처럼 아노미 상황인데도 8개월 앞으로 다가온 총선을 앞두고 여의도에 입성하려는 정치지망생들의 열기는 그 어느 때보다 높다. 최근 한나라당이 공모한 9개 사고지구당의 조직책 신청에 51명이나 몰려들어 5.6 대 1의 경쟁률을 보인 것이 단적인 예다.

오죽하면 민주당 주류가 추진 중인 신당의 원동력은 바로 이 정치지망생들의 정치폭발 현상이란 분석이 나올 정도다. 80년 신군부가 정치규제를 통해 ‘강압적인 정치판 물갈이’를 한 이후 3김 시대를 거치며 제대로 해소되지 못한 신규 정치수요가 결국 신당을 태동시킬 것이란 논리다.

물론 ‘되기만 하면 100여 가지가 달라진다’는 금배지를 향한 정치지망생들의 열망을 탓할 수는 없다. 좋은 자질의 정치인을 뽑아 국회로 보내는 일은 정치 선진화의 필수전제이기도 하다.

문제는 굿모닝시티 로비사건 수사와 현대비자금의 총선자금 유입 의혹으로 정치권 전체가 다시 한번 ‘검은돈’ 파문에 휩싸이고 있는데도 정치권에선 여전히 ‘남의 탓’ 공방만 무성하다는 점이다. 정치자금을 둘러싼 ‘검은 거래’의 의혹이 끝없이 되풀이되는데도 ‘정치의 틀’을 어떻게 바꿀까에 대한 진지한 논의보다는 정쟁(政爭)의 소재로 활용하려는 자세가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7월 20일 발표해 곧 국회에 제출할 예정인 정치개혁 법안만 해도 그렇다. 여야는 정치자금의 모금액 상한선 높이기나 선거공영제 확대와 같은 ‘돈 쓰는’ 부분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정작 정치자금의 ‘투명성’을 위해 일정액 이상의 수입 지출을 수표로 하고 기부자를 실명공개하자는 대목에 대해서는 모두 떨떠름한 태도다.

더욱이 ‘돈 선거’를 막기 위한 시민단체들의 정당 슬림화 요구에 대해서는 각 당이 선거를 앞둔 현실을 내세워 ‘당신이 먼저’라며 서로 미루고 있는 형편이다.

정쟁의 본질은 문제가 ‘남의 탓’임을 설득력 있게 유권자들에게 전달하는 일이다. 하지만 이제는 근본적 정치개혁을 위해 천주교에서 몇 년 전 벌였던 ‘내 탓이오’ 운동이라도 벌여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런 점에서 본보의 ‘정치인 참회록’ 취재에 흔쾌히 응해 ‘내 탓이오’를 고백한 정치인들에게 다시 한번 격려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동관 정치부장 dk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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