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민족은 없다'…열린공동체로 가는길

  • 입력 2003년 8월 8일 17시 4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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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은 없다/고자카이 도시아키(小坂井敏晶) 지음 방광석 옮김

/292쪽 1만2000원 뿌리와이파리

국가와 민족을 위해 산화하는 열혈아는 자신이 실재하지도 않는 것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허망한 짓을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조국과 후손을 위해 의미 있는 일을 한다고 자부하는 애국자는 자신의 행위가, 이미 형성된 사회질서 속에서 타인을 지배하는 제도의 영속화에 공헌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한다. 저자의 논리를 빌리면 이는 민족과 국가라는 허구가 훌륭하게 은폐되어 존재 자체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국가와 민족이라는 근대의 기제(機制·mechanism)가 소속집단에 대한 자기동일시를 강요하고 내부와 외부를 구별하면서 차별과 학살까지도 산출한다는 근대성의 범죄만을 논하지는 않는다. 근대의 과학성과 정치적 성격이 아니라 인식론 또는 인지과학을 매개로 인간들 사이의 관계로부터 도출되는 집단의 존재양식, 그리고 그 집단에 동일화하려는 인간의 행동양식을 분석하면서 사회와 인간의 존재론적 의문에 대한 해답을 모색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2000년에 프랑스어로 처음 발간될 때의 원제인 ‘이방인과 정체성:문화통합에 관한 시론’은 건조하기는 하지만 책의 내용과 의미를 정확하게 요약하고 있다. 인간들 사이의 관계로 형성되는 사회의 질서가 유지되고 연속성이 보장되기 위해서는 민족이나 국가 이데올로기 문화라는 허구가 필요하며, 이 허구들은 본질적인 것이 아닌 변화하는 동일화의 기제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집단 내부의 소수파(이방인)의 정체성과 영향력에 대한 포용과 인정이야말로 차이로 인한 갈등의 소지를 없애는 ‘열린 공동체’로의 첩경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민족은 없다’라는 한국어판 제목은 책의 의미와 가치를 신물 나는 포스트모던의 아류쯤으로 왜곡 폄하할 가능성이 크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흄과 마르크스, 베버와 소쉬르 등을 섭렵하고 불교적 세계관까지 원용하는 자신의 접근방식에 대해서 포스트모던이라는 딱지를 붙이지 말기를 원한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아리스토텔레스적 분류와 비교의 사유방식 부인, 만물은 유전한다는 식의 고대 그리스 자연철학으로의 회귀, 민족동일성 해체의 시도 그리고 근대적 합리주의에 대한 비판을 통해 탈근대적 사유의 계기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포스트모던의 편린을 지니고 있다.

‘열린 공동체’를 지향하자는 결론에 다소 공허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은 읽어가는 과정에서 논리전개의 치밀함과 학문적 저변의 광대함에 기대감이 한껏 고조되기 때문일 것이다. 평이한 제목과 달리 생물학과 심리학, 사회학과 정치학 등의 복잡한 이론적, 실증적 탐구의 결과들을 쉽게 이해할 자신이 없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 심심풀이로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다.

이웅현 고려대 평화연구소 연구교수·국제정치학zvezda@kore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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