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모던수필'…우리 산문의 맛과 향과 멋

  • 입력 2003년 7월 18일 17시 1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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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 수필 /방민호 엮음/304쪽 1만원 향연

나는 거짓말을 참말처럼 하고 싶어 소설을 택했다. 시도 약간의 사기는 가능하다. 그러나 수필은 거짓말을 참말처럼 할 수가 없다.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은 더더욱 아니다. 인생을 꿰뚫어보는 눈을 가진 자만이 쓸 수 있는 게 수필이다. 글 보는 눈이 매운 방민호가 이번에는 ‘모던 수필’을 엮어냈다.

지난겨울에 산문집 ‘명주’를 본 것 같은데, 또? 그의 글 욕심은 어지간하다. ‘그래 월매나 모단한가 함 보자’, 버르장머리 없는 심사로 이미 죽은 자들의 산문을 읽게 되었는데 고만 나도 모르게 빨려 들어가 그들에게 말을 걸고 싶어지는 거였다.

1920년대부터 광복 직후까지 발표된 수필을 가려 뽑은 것이니 일제강점기의 그들과 나 사이에는 무려 70년 시간의 차가 흐르는 강처럼 엄연히 존재한다. 그러니까 강 이쪽에서 강 저쪽 사람들의 글을 그 생의 간극, 시간의 간극을 들여다보느라 눈을 게슴츠레 내리뜨고 한줄 한줄 읽어나갈 제, 시간의 강을 훌쩍 건넌 죽은 자들이 가만가만 다가와 내 머리를 만지는 거였다. 처진 어깨와 살처럼 빠른 시간을 따라잡느라 고단했던 내 등을.

가령 나도향의 이런 글들.

‘원고 수집 기한은 닥쳐온다. 약간의 힌트를 얻어 두었던 것으로 덮어놓고 붓을 잡으니 지리학자나 탐험가가 약간의 추상을 가지고 길을 떠나는 것 같다. 자기가 지금 시작한 첫 구절 뒤에는 어떤 글이 계속될는지 써보지 않고 알 수 없으니 일종의 모험이라 부르고 싶다.’

위의 글을 읽으면 도향에게 간밤 내가 얼마나 깨지고 깨졌는지, 그의 소매를 잡고 이르고 싶고 묻고 싶어 입속이 갈근갈근해진다. 나는 지금 그를 불러내고 싶은 것이다.

고향인 강원 춘천을 무대로 토속적인 세계를 그려내던 유정은, 일찍이 자신보다 나이 많은 당대의 소리꾼으로 소문난 기생에게 반해, 밤낮없이 쫓아다니며 결혼하자 졸랐다 하니 딴은 남의 일 같지가 않다. 나는 유정에게 턱도 없는 참견을 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무릇 사랑이란 한 줄기 번개처럼 찰나에 눈빛이 서로 얽혀들어야 하거늘, 혼자 좋아 그리 쫓아다니면 될 일도 안 되니 어서 작전을 바꾸라고.

말년의 이상은 날개가 부러져서 기거도 바로 못하고 이불을 둘러쓰고 앉아 있다가 김기림에게 남긴 “그럼 다녀오오. 내, 죽지는 않소”가 마지막 말이 되고 말았다니. 70년 세월의 강을 훌쩍 건너뛰어 지금 이상이 돌아온다 해도 그는 여전히 세상과 불화했을 것이다. 문사의 글이 썩은 도끼자루만도 못한 취급을 받는 이 시대에 절망하여 그는 혹 ‘뽕’ 같은 것에 손을 대지나 않았을까? 별의별 상상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때는 2003년 여름, 바야흐로 복중을 지나고 있으니 그들이 내 뒤통수에 발칙하다 눈 흘기지는 않으리.

이현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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