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필담: 구니오와…'편지로 주고 받은 '문학사랑'

  • 입력 2003년 5월 30일 17시 1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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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즈무라 미나에. 쓰지 구나오
미즈무라 미나에. 쓰지 구나오
◇필담: 구니오와 미나에의 문학편지/쓰지 구니오, 미즈무라 미나에 지음 김춘미 옮김/267쪽 9000원 현대문학

요즘 나는 권태란 어디서 갑자기 밀려오는 게 아니라 그냥 원래부터 거기에 있던 것이며 삶의 목표와 의미를 상실했을 때, 더 이상 그것을 넘어갈 의지가 부족할 때 드러난다는 걸 절실하게 깨닫고 있는 중이었다.

작가의 가장 큰 비극은 자신감의 상실이고, 그건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직도 나는 책 속에 길이 있다고 믿는 세대이므로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책을 찾아 읽으려 애쓰고 있었다.

그러한 어느날 읽게 된 책이 바로 ‘필담’이다.

필담(筆談)이란 글을 써서 서로 묻고 대답하는 걸 말한다. 속도의 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이 시대에 웬 필담이라니. 편지를 쓰는 대신 사람들은 아마 전화를 하거나 e메일을 쓰지 않을까.

노 작가 쓰지 구니오와 현재 일본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젊은 작가 미즈무라 미나에는 책 한 권 분량이나 되는 많은 편지를, 그것도 ‘문학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들은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서로의 사진이나 글을 통해서 상대에 대해 상상했고 그 상상의 시간은 서로에게 날마다 ‘커다란 꽃다발을 선물받는 것’ 같은 기쁨을 느끼게 했다.

언어가 얼마나 강렬한 접촉 수단인지, 우리는 가끔 잊고 산다. 동서고금의 문학작품들을 자유자재로 누비며 진솔하게 자신의 문학관과 인생을 토로하는 그들의 편지는 1년4개월 동안 아사히신문에 연재되었다.

쓰지 구니오와 미즈무라 미나에, 두 작가는 이제 문학은 스탕달의 표현처럼 ‘행복한 소수의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되었을지언정 ‘소설은 시민사회의 서사시’라는 걸 신앙처럼 믿고 있는 작가들이다.

필담을 나누는 동안 그들은 선배에게서는 지혜를, 후배에게선 감각을 배웠으며 무엇보다도 뜨거운 우정을 나누었다. 일면식도 없던 두 작가를 이어준 건 ‘문학’, 누구나 읽어야 하는 것이며 누구나 읽을 수 있는 ‘문학’에 대한 사랑이었다.

‘필담’을 다 읽고나니 어쩌면 내 고민과 권태가 조금은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든다. 문학의 진정한 의미, 쓰고 읽는 것의 행위가 무엇을 뜻하는지, 문학의 위엄과 그 큰 감동에 대해 이 책은 말한다.

그리고 매일 한결같이 히드 황야를 배회하던 비쩍 마른 처녀, 언덕 너머의 삶과 죽음을 삼켜버리는 어두운 세계를 바라보던 에밀리 브론테가 쓴 ‘폭풍의 언덕’과 보르헤스가 좋아했다는 ‘적과 흙’이 다시 간절히 읽고 싶어진다.

내게 좋은 책이란, 그 책을 읽고 난 뒤 그 다음에 읽어야 할 책들을 가르쳐주는 책이기도 하다. 쓰지 구니오의 말처럼 ‘인간이 글을 쓰고 글을 읽는다는 것은 정신이 있기 때문이며 정신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영원 가운데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겠지.

독서. 그래, 그것은 나의 고독을 지탱해주는 또 다른 힘이다.

조경란·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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