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포럼]유종호/‘성공한 대통령’ 보고싶다

  • 입력 2003년 5월 18일 18시 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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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바그다드와 쓰러지는 사담 후세인 동상을 화면에서 보며 연상한 것은 엉뚱하게도 불타는 경복궁이었다. 임진란 당시 왜군의 서울 입성이 임박해지자 선조는 허둥지둥 몽진 길에 오른다. 왕이 궁성을 떠나자 난민들이 장예원(掌隷院)을 비롯해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에 불을 질렀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선조가 개성에 이르자 큰소리로 항의하고 투석하는 자도 있었다.

▼행보-언어구사 자제 필요 ▼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역대 최고 권력자가 맞이한 말년도 크게 다르지 않다. 초대 이승만 대통령은 망명길에 올랐고, 그의 동상도 무참히 쓰러졌다. 쿠데타 소식에 안경 쓸 경황도 없이 수녀원으로 도망쳐 숨어 있던 장면 총리는 며칠 후 사직한다는 기자회견을 했다. 늘 쓰던 안경을 벗은 채였다. 18년 후 박정희 대통령은 최측근 인사의 거사로 풍운의 일생을 마친다. 유혈 진압의 원죄를 자초한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의 자업자득은 수감생활로 이어졌다. 문민정부의 김영삼 대통령은 서너 차례의 대국민 사과와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라는 수모를 겪었다. 최근 퇴임한 김대중 대통령은 가족 및 핵심 실세들의 비리에 더해 현재 조사 중인 대북송금 의혹으로 신뢰성에 치명타를 입었다.

한결같이 불행한 최고 권력자로 끝난 이들에게도 긍정적인 측면이 없지는 않다. 월드컵 때 열창했던 ‘대한민국’은 너무 고령에 국가 경영을 떠맡는 불운을 안고 있던 이승만 대통령이 아니었다면 존재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장면 총리는 비겁했지만 민주정치에 대한 지향을 보여주었다. 박 대통령은 좌파 역사가 에릭 홉스봄으로 하여금 ‘역사상 어느 사례 못지않은 산업적 성공 사례인 남한’이라고 역사책에 적게 했고, 평균 수명 연장과 산림녹화에 크게 기여했다. 문민정부의 김영삼 대통령은 권위주의적 행태에서 탈피하려는 노력을 보여 신상 변화 없이 퇴임한 사실상의 첫 집권자가 되었다.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으로 엇갈리고 있으나 최종적인 평가는 앞으로의 남북관계가 내려 줄 것이다.

한 외국의 옵서버는 제1인자였던 인물이 계속 모욕당하는 나라는 세계에 달리 없을 것이라고 적고 있다. 불행한 국가 경영자만 배출한 국민도 불행하기는 매한가지다. 민주정치의 경험도 이제 반세기를 넘었고 정당성에 의문부호가 빠진 정부가 들어선 지도 10년이 넘었다. 이제 우리는 성공한 대통령을 가질 만한 시기가 되었다. 아니 퇴임 후 최소한의 시민적 경의에 값하는 국가 지도자를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왕궁 방화로 상징되는 불행의 역사를 되풀이하는 셈이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민 편에서도 새 정부에 대한 과도하고 성급한 기대를 자제하는 성숙한 자세를 보여 주어야 할 것이다. 느림의 철학은 일상생활뿐 아니라 희망사항과 기대감에도 필요하다.

가장 중요한 것이 노무현 대통령과 참모들의 행보임은 말할 것도 없다.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수고해 준 전임자들이 수두룩하기 때문에 선택지는 극히 명료하다고 생각한다. 취임 3개월이 되어가는 지금 노 대통령은 많은 것을 체득했을 것이다. ‘동북아시아의 중심’이란 정치적 수사(修辭)가 촉발한 인접 국가의 반응과 압력은 언어의 위력과 함께 신중한 언어 구사의 필요성을 절감케 했을 것이다. 지금은 고인이 된, 장관 경력을 가지고 있는 한 대학교수가 “정부에 들어가 보니 바깥에서 생각한 것과 많이 다르더라”고 실토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국가 경영의 어려움에 대한 체험이 과(過)기대를 촉발하는 언사의 자제로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비판 잘 포용해야 ‘성공 대통령’▼

대통령은 지역, 세대, 취미 동아리의 대표가 아니다. 반대자와 비판자들을 얼마만큼 비판적 지지자로 만들 수 있느냐에 성패가 달려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잡초와 화초의 이분법은 무의식 차원에서라도 지워주기 바란다. 민주화 노력이나 재야 투쟁 이력도 앞세우지 않기를 바란다. 지탄받는 친일파의 대부분은 크고 작은 독립운동의 이력을 갖고 있다. 말 바꾸기나 갈지자 행보도 없어야 할 것이다. 도덕성을 내세운 정권일수록 도덕성 훼손은 치명적이다. 난생 처음으로 연하의 대통령을 갖게 된 노년 세대는 꼭 성공한 대통령의 모습을 보고 싶다. 노 대통령이 유일한 기회인지도 모르기 때문에 우리의 기대는 더욱 간절하다.

유종호 연세대 특임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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