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홍찬식]유민과 이리키

  • 입력 2003년 4월 4일 18시 1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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탤런트 유민에 대해 두 번 크게 놀랐다. 한 번은 그가 일본인(후에키 유코)이라는 사실을 알고였고 또 한 번은 젊은 세대, 특히 남성들에게 뜨거울 정도의 인기를 누린다는 얘기를 듣고 나서였다. 별로 새로울 것도 없는 이런 얘기를 꺼내는 것은 일본에 대한 문화적 코드가 전에 비해 무척 달라졌다는 생각 때문이다.

탤런트로서 일본인이라는 사실은 이전 같으면 어떤 장점으로도 만회가 안 되는 ‘결정적 하자’였다. 학창 시절 3·1절이나 광복절이 되면 일본에 당했던 수난과 고초를 떠올리며 비장한 마음을 갖던 기억이 새롭다. ‘기미년 삼월 일일 정오, 터지자 밀물같은 대한독립 만세’로 시작되는 3·1절 노래는 아직도 생생하게 뇌리에 남아 있다. 이런 정서에서 일본인 탤런트가 우리 안방극장에서 인기를 누린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안방서 야구장서 만나는 '일본'▼

그러나 얼마 전 유민이 나온다는 TV프로를 보니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토록 잘생기고 매력 넘치는 한국 남자연예인들이 그에게 집중적으로 프러포즈를 하고 있었다. 혼란스러운 느낌이었다. 그렇지만 ‘수많은 시청자가 지켜보는 지상파 방송에서 저래도 되겠느냐’는 의문에 대해 젊은 세대의 반응은 한마디로 ‘뭐가 문제될 게 있느냐’는 시큰둥한 것이었다.

올해 프로야구 두산 팀에서 뛰게 될 일본인 이리키 사토시 투수는 그가 어떤 성적을 올리든 상관없이 한일 교류사에 이름이 남을 것이다. 한국 프로야구에서 뛰는 최초의 일본인 선수이기 때문이다.

이리키 투수는 일본 NHK 위성방송의 스포츠중계를 통해 여러 번 본 적이 있는 낯익은 인물이다. 99년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에는 같은 투수인 동생(이리키 유사쿠)과 한 팀에서 뛰어 화제를 모았고 야쿠르트팀으로 이적해서는 주축 투수로 활동해 2001년 시즌 우승을 이끌었다. 친정팀 요미우리팀을 상대로 자신을 내쫓은 ‘복수’를 보란 듯이 해낸 것이 인상적이었다.

20년이 넘은 우리 프로야구사에 그가 최초의 일본인 선수라는 점은 크게 내세울 일은 아니다. 이치로 사사키 마쓰이 같은 일본 프로야구 선수들이 미국 메이저리그에 진출해 맹활약을 할 만큼 야구 수준이 우리보다는 한 수 위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동안 일본인 선수를 수입하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는 국민 정서였다.

선동렬 선수를 비롯한 많은 한국 선수들이 일본 프로야구에서 뛰었던 점을 감안하면 상호주의 원칙에 맞지 않는 일이었지만 그런 고무줄 잣대가 통하는 것이 또 한일 관계이기도 했다. 입장을 바꿔 일본의 시각에서 바라본다면 한국의 폐쇄성이 너무 심하지 않으냐는 불만이 나올 법도 했다.

일본 대중문화의 개방 문제만 해도 그동안 몇 번에 걸쳐 개방을 했음에도 아직 마지막 개방 조치가 남아 있다. 한국 정부는 일본이 한일관계에서 달라진 모습을 보이면 추가 개방을 하겠다는 것이지만 문화교류의 관례상 억지나 다름없다는 것은 우리가 더 잘 알고 있다. 일본 대중문화는 오래전 국내에 들어와 마지막 개방 조치의 여파는 미미할 것으로 전망된다. 개방을 하더라도 문서를 주고받는 ‘페이퍼 개방’에 불과할 것이다.

한일 관계는 전환점에 서 있다. 일본인 탤런트가 안방을 사로잡고 일본인 투수가 잠실야구장 마운드에 오르는 새로운 변화가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월드컵 이후 두드러지고 있는 이런 분위기는 사소한 조짐 같아 보여도 의미는 작지 않다. 문화는 모르는 사이에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킨다. 그것이 ‘역사의 가해자’ 일본이 장기간에 걸쳐 준비하고 의도했던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 또한 현실이다.

▼전향적 자세로 ‘현실’ 대해야▼

역사적 교훈과 상흔은 결코 잊어서는 안 되지만 일본을 바라보는 시각을 달리할 때가 가까워 오고 있다. 그것이 대세라면 피해자인 우리가 한일 관계의 주도권을 갖는다는 의미에서도 전향적 자세를 가져야 한다. 일본이 좀처럼 반성의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 쪽에서 먼저 너그럽게 나서는 것이다. 당신들은 반성하지 않지만 우리는 그것에 더 이상 연연하지 않겠다고. 오늘 개막되는 프로야구에서 두산의 오랜 팬으로서 이리키 선수의 선전을 보고 싶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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