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시욱칼럼]'엉거주춤한' 4· 3 보고서

  • 입력 2003년 4월 2일 19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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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는 결국 최종 결론을 보류한 엉거주춤한 내용이 되고 말았다.

보고서의 ‘잠정 결론’에 따르면, 이 사건은 “1947년 3·1절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해서 경찰과 서북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單選)·단정(單政) 반대를 기치로 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54년까지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 충돌과 토벌대의 진압 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정의되었다.

▼논란의 소지 남긴 '잠정결론' ▼

결론적으로 이 사건은 기왕에 수정주의자들이 주장하던 ‘민중항쟁’으로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그러한 요소가 이 사건에 개재되어 있었음이 인정된 것이다. 종래의 정부 공식 견해인 ‘남로당 폭동’ 규정이 ‘민중항쟁론’에 반쯤 밀린 셈이다.

보고서의 용어도 ‘탄압’, ‘저항’, ‘단선·단정반대’, ‘무장대’, ‘무장봉기’, ‘무력충돌’이니 하여 남로당의 경찰서 습격과 살인 행위에 대해 중립적 표현을 썼다. 대한민국의 권위가 단어의 선택에서 밀린 셈이다.

이 때문에 일부 조사위원은 이 사건의 단초와 본질은 대한민국의 건국을 방해하기 위해남로당 제주도당이 일으킨 폭동이 분명한 데도 이를 제대로 조명하지 않고 주민 학살이 오로지 군경의 강경 진압 탓인 것처럼 결론을 내리려 한다고 주장하며 위원직을 사퇴했다. 재향군인회 등 관련 단체와 보수 진영에서는 별도의 조사단을 만들어 진상보고서를 다시 만들어야 한다고 반발하고 있다.

가장 큰 논란거리는 이 보고서가 사망자 6명, 중상자 8명을 낸 47년 3·1절의 경찰 발포사건이 4·3사건을 촉발시킨 ‘도화선’이 되었다고 전제하고 이를 민중항쟁적 요소의 근거로 삼은 점이다. 경찰의 발포로 생긴 사상자가 대부분 구경하던 일반주민이어서 이 사건을 계기로 민심은 더욱 악화되었으며 제주도민의 반감과 저항이 이 사건의 한 요인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경찰의 발포에는 배경이 있다. 남로당은 이 날을 맞아 지역별로 대대적인 3·1절 기념 인민대회를 열고 시위를 벌이도록 지시한 것이다. 제주에서는 당국이 집회를 불허하자 대회를 강행해 약 3만명의 군중이 참석했다. 이들 중 일부가 경찰서에 몰려가 경찰이 발포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렇다면 경찰의 발포로 인해 주민들의 저항이 유발되었더라도 이 시위에서 비롯된 이상 그것을 순수한 민중항쟁적 요소로 보는 것은 무리가 아니냐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지적이다.

하기야 보고서가 이 정도로 된 것만 해도 다행이라는 반응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4·3사건을 이런 식으로 애매하게 규정하는 것이 엄정한 역사적 평가인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견해들이 보수적 단체들 밖에서도 들린다.

보고서는 ‘잠정 결론’에서 “이 사건의 배경은 극히 복잡하고 다양한 원인들이 착종돼 있어 하나의 요인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했다. 상당히 고심한 흔적이다. 그러나 어떤 사물이든지 복합적인 요소는 있게 마련이지만 그 본질은 있다. 어느 시대건 모든 정치 세력은 국민의 불만을 이용하기 마련이다.

보고서 처리가 이렇게 된 상황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이 사건에 대한 정부의 입장 표명을 1년 동안 보류키로 한 것은 당연한 결과다. 그는 이런 상태에서 자신이 제주도에 내려가는 것이 옳은지 결론을 내리는 것은 불가능하다면서 정부 차원의 입장 표명을 내년 이 사건의 56돌 추모식 때 하기로 했다.

▼본질 왜곡하면 國基흔들 우려 ▼

이 사건 진상조사위원회는 앞으로 6개월 동안의 이의신청 기간 안에 새로운 사실이 추가로 나오면 이번 잠정 보고서의 내용을 수정할 수 있도록 했다. 현재 많은 논란이 일고 있으므로 진상조사위원회는 후일을 위해서라도 더욱 열린 자세로 광범위하게 의견들을 들어야 할 것이다.

다만 4·3사건의 본질이 어떻든, 무고하게 희생당한 양민들의 명예가 회복되어야 함은 이론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그 수가 몇 천, 몇 만명이 되더라도 그들의 억울함을 씻어 주어야 한다. 그러나 사건의 본질을 잘못 규정하면 국가의 기초가 흔들릴 우려가 있다는 점을 인식해 신중을 기해야 한다.

남시욱 언론인·세종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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