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전망대]허승호/한 기업인과의 대화

  • 입력 2003년 3월 30일 18시 4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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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점심시간을 이용해 고가의 치과용품을 생산하는 한 기업을 방문했다. 해당 부문에서 국내시장 점유율이 70%쯤 되는 회사다. 사장(당사자의 요청에 따라 익명 처리합니다)은 기자의 지인(知人)이지만 그 회사를 찾은 것은 처음이었다.

시장점유율 70%라면 거의 독점에 가깝다. 그런 위상이라면 관계부처 공무원들과도 친분을 유지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렇지만 그는 그 쪽 일을 잘 모른다고 했다.

“나는 정부와 별 접촉없이 사업한다. 어떤 공무원은 ‘왜 정책자금을 쓰지 않느냐’고 내게 묻곤 한다. 그러나 그것에 맛들이면 큰일난다. 사업할 생각은 하지 않고 ‘눈먼 돈’만 찾아다닌다. 마약이다. 어떤 기업은 벤처자금, 중소기업 지원자금, 통상산업부 지원자금, 경기도 지원자금 등을 빙글빙글 돌아가며 얻어 쓴다.”

회사 구경 갔다가 꽤 흥미로운 얘기를 듣게 됐다. 그가 계속 속마음을 토해내도록 조심조심 목구멍을 간질였다. ‘그래봐야 결국 돈을 빌리는 것 아닌가?’

“아예 주는 것도 여럿 있다. 연구비로 10억원 필요한데 5억원은 회사가, 5억원은 정부가 부담하는 식이다. 이런 기업의 연구원들은 기술연구가 아니라 ‘돈 타내는 데 필요한 번지르르한 보고서 쓰기’를 주업무로 삼는다. 그런 기업은 오래 못 간다. 자금줄이 끊어지면 죽는다. 이것이 2000년 ‘정보기술(IT) 거품’의 한 원인이다. 다 이유가 있다. 공무원들이 주무르는 돈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눈먼 돈이 굴러다니면 그것만 따먹으려는 전문가들이 반드시 나타난다. 그게 경제법칙이다. 정부의 제도 세팅(setting)이 잘못됐다.”

함께 도시락을 먹으며 계속 물었다. ‘정부는 손을 떼란 말인가?’

“국가는 민간기업이 할 수 없는 일만 해야 한다. 산업인프라 구축이다. 전략산업 육성을 위한 연구지원도 과정과 성과를 엄밀히 검증할 수 있는 정교한 장치가 마련된 후 해야 한다. 제대로 운용할 자신이 없으면 아예 시작하지 않는 게 훨씬 낫다. 여차하면 시장친화가 아니라 시장왜곡적 기능을 하게 된다.”

다른 질문을 던졌다. ‘왜 기업을 하는가?’

“나는 애국하겠다는 생각이 별로 없다. 오직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궁리한다. 그러나 그것이 진짜 애국하는 길이 아닌가. 애국이나 사회활동도 좋지만 자칫 회사가 거덜나면 그건 나라 망치는 일이다. 기업은 생존하고 성장하면서 고용하고 세금내야 한다. 건방지게 들리겠지만 우리 같은 기업이 많아야 나라가 된다.”

회사를 나오면서 이 기업인처럼 공무원이 누구인지, 대통령이 누구인지 모르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잘사는 세상이 돼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이것이 투명한 경제이고 선진시스템이며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다.

새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해 기대도 많고 염려도 많다. 우리가 가야 할 길, 새 정부가 해야 할 일도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허승호 경제부 차장 tige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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