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선비와 피어싱'…옷 이름엔 사연 있었네

  • 입력 2003년 3월 28일 17시 2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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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운홍(劉運弘·1797∼1859)의 ‘기방도’. 조선 후기 기방 여인들의 ‘유행’을 잘 드러낸다. 저고리는 가슴이 드러날 정도로 짧아져 있고, 머리는 크게 만들어 얹었다. 허리띠를 한 여인도 보인다.사진제공 동아시아
유운홍(劉運弘·1797∼1859)의 ‘기방도’. 조선 후기 기방 여인들의 ‘유행’을 잘 드러낸다. 저고리는 가슴이 드러날 정도로 짧아져 있고, 머리는 크게 만들어 얹었다. 허리띠를 한 여인도 보인다.사진제공 동아시아
◇선비와 피어싱/조희진 지음/325쪽 1만5000원 동아시아

‘개화’된 세상에 살다보니 거리에서 눈에 밟히는 것 중 우리 것이 드물다. 사람들이 입고 다니는 옷들은 대개 서양식이고, 그것이 이제는 아주 당연한 것처럼 됐다. 정장(正裝)이라고 하면 으레 양복이요, 대통령이 두루마기를 입으면 뉴스가 된다. 어쩌다 맞은 명절에 대님 매는 것도 큰일로 여겨지는 시대. 학문과 글 솜씨를 갖춘 젊은 재담가가 늘어놓는 우리 옷, 우리 문화에 관한 이야기는 요즘 더욱 신기하고 절절하다.

한복은 한국의 전통과 상징문화, 우리가 잘 알지 못한 많은 사연을 담고 있다. 한 뼘 한 자락 펼쳐보고 들여다볼수록 재미있고 희한하기까지 하다.

‘허리띠’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는가. 구멍 숭숭 뚫린 가죽 허리띠를 생각하면 안 된다. 허리띠는 1920년대까지 한국 여성들 사이에서는 보편적으로 사용됐던 ‘옷’이다. 길이 1m 정도, 폭 20∼25㎝ 정도의 천으로 만든 허리띠는 그 명칭과 달리 가슴가리개였다. 요즘의 브래지어에 해당한다. 그런데 딱히 그렇게 말할 수도 없는 것이 브래지어는 ‘속옷’인 데 비해 허리띠는 속옷이면서 또 겉옷이기도 한 그런 물건이었다. 요컨대 옷 속에 여며 입되 겉으로도 내보이는 옷이 바로 허리띠였다. 부녀자들이 허리띠를 하는 것은 조선 후기에 생긴 풍습이다. 조선 후기 들어 저고리 길이가 짧아지면서 치마와 윗옷 사이의 맨살이 드러나게 되고 심지어 가슴까지 보이는 경우가 있었다. 이를 막기 위해 자연스럽게 허리띠가 생기게 된 것이다.

조선시대가 어떤 시대인가. 유교가 뿌리내리고 격식이 강조되던 사회가 아니던가. 그러나 그 시대에 여인네들의 유행은 유교적 격식이나 체통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짧아지는 저고리. 사회규범과 단속으로도 막을 수 없었던 것이 바로 유행이요 그 유행을 좇는 여인의 마음이었다.

유행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마디 더 붙여보자. 조선 정조 때 여인네들이 가체(加체)를 금지하는 법령이 내려진 일이 있다. 가체는 머리에 남의 머리카락을 붙여 풍성하게 만든 부분 가발이다. 당시에는 머리채를 크게 만들어 얹고 갖은 장식을 하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조정에서는 이것이 사치를 조장하는 풍속이라고 해서 금지령을 내렸다. 머리채 하나를 장식하는 데 심하게는 집 10채 값이 들어가는 경우도 있었다니 아무리 상류층의 호사라고 해도 나라가 걱정할 만했다. 그런데도 이 풍속이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던 것을 보면 유행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여심은 예나 지금이나 나라가 나서도 막지 못할 일이다.

지은이는 이 책에서 허리띠니 가체니 하는 옛날의 유행부터 구멍 뚫린 여름 속옷인 ‘개당 고쟁이’, 심지어 여성들의 ‘개짐’까지 종횡무진 우리 옷에 얽힌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글 쓰기 형식은 자유롭지만 결코 가볍거나 소홀하지 않다. 성실하고 꼼꼼하게 자료를 챙겨 베를 짜듯 능숙하게 줄거리와 엮어 붙였다. 여기에 현대와 과거를 넘나드는 폭넓은 운신으로 글에 가치를 더했다. 조선시대의 가체를 논하면서 오늘날 두발 자율화를 부르짖는 중고교생의 심정을 연결시킬 줄 아는 것은 지은이의 탁월함이다.

‘복장문화’를 전공한다는 28세의 신세대인 지은이가 과거와 현대의 문화에 관해 불쑥 내놓는 당돌한 의견은 간혹 당혹스럽다. 그러나 그의 이런 ‘사견’이 글 전체의 틀을 흐트러뜨리는 걸림돌이 되지는 않는다.

주성원기자 s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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