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최동원 부친 최윤식씨 작고

  • 입력 2003년 3월 17일 18시 19분


코멘트
'무쇠팔' 최동원(46·전 한화코치)의 부친 최윤식씨가 17일 작고했다. 향년 72세. 최윤식씨는 최동원이 현역시절 아버지 역할을 뛰어넘어 코치와 에이전트까지 공 던지는 것만 빼고 아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대신했다. 최동원의 곁엔 늘 아버지 최씨가 그림자처럼 있었다.그래서 사람들은 한때 최동원을 '파파보이'라고 부르기도 했을 정도였다.

최동원은 어린 시절부터 고인의 철저한 준비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이었다. 그는 일본에서 어렵게 구해온 야구서적을 이용해 아들을 직접 가르쳤다. 게으름을 피우는 것을 막기 위해 메리트 시스템을 적용한 것은 아마 그가 국내 최초였을 것이다. 이런 그가 나중에 아들을 대신해 연봉 협상 테이블에 앉은 것은 너무나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나 고인은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88년 '악수(惡手)'를 두기도 했다. 그는 2월 소속팀인 롯데의 연봉 동결에 맞서 전년도 8910만원보다 90만원이 오른 9000만원을 불렀다.그리고 박종환 당시 롯데 전무가 자신을 인신공격했다며 사과문을 요구하는 등 지리한 감정싸움을 시작했다.

결국 이 싸움은 88년 최동원을 반시즌이나 미계약 선수로 남아 있게 한 초유의 사태를 낳았다. 더욱이 고인은 그해 8월10일 자신이 후견인으로 나서 한국프로야구선수협의회의 창설을 주도했고 아들은 회장, 자신은 고문으로 추대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선수협은 구단의 집요한 방해공작에 정족수 미달로 무산됐고 최동원은 그해 겨울 삼성으로 보복성 트레이드가 된 뒤 시름시름 제몫을 못하다 2년후 은퇴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하지만 고인은 불평등 규약으로 중무장한 구단의 전횡에 맞선 국내 프로야구 최초의 사례로 역사에 남았다. 또 극성스럽기 짝이 없었지만 만약 이런 그가 없었다면 7,80년대 한국 최고의 투수로 군림했던 최동원은 탄생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유족으로는 최동원을 비롯, 석원(제일기획 전파미디어팀 차장), 수원(한국야구위원회 심판위원)이 있다. 발인 19일 오전 김포 우리병원. 031-985-1742.

장환수기자 zangpabo@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