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시는 붉고 그림은 푸르네'

  • 입력 2003년 3월 14일 19시 2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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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붉고 그림은 푸르네(1, 2)/황위펑(黃玉峰) 책임편집 서은숙 옮김/1권 359쪽 2권 367쪽 각권 1만5000원 학고재

將仲子兮 無踰我里 無折我樹杞(장중자혜 무유아리 무절아수기)

豈敢愛之 畏我父母(기감애지 외아부모)

仲可懷也 父母之言 亦可畏也(중가회야 부모지언 역가외야)

……

제발 둘째 도련님/ 우리 집 골목길 넘어/ 우리 냇버들 꺾지 마오

나무가 어찌 아까우리요/ 부모님이 두렵지요

그대 보고 싶지만/ 부모님의 말씀/ 역시 따라야 하지요

화암의 ‘천산적설도’는 눈 쌓인 산, 산 위의 기러기, 산 아래의 사람과 낙타가 색채와 구도의 대비를 이루며 강한 생명력과 삶의 의미를 일깨워준다.사진제공 학고재

……

중국 최고(最古)의 시가집인 ‘시경(詩經)’ 중 ‘정풍(鄭風)’에 나오는 노래의 한 구절이다. 한 청년을 사랑하지만 부모님의 뜻을 감히 거스르지 못하는 소녀의 애타는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사랑에 빠진 소녀의 내적 갈등을 솔직 담백하게 드러낸 표현도 일품이지만 이에 대한 이 책의 풀이는 더 일품이다.

“자연적 인간은 욕망에 휘둘리고, 사회적 인간은 이성의 제약을 받게 마련이다.”

자연인인 인간은 사랑과 같은 본능적 욕망의 지배를 받지만, 또 한편으로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이성을 가진 인간은 그 사회의 가치관에 의해 스스로를 통제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노래는 바로 이런 자연적 욕망과 이성적 판단 사이의 갈등과 긴장을 담고 있다는 풀이다.

이 책에서는 중국 고대의 시가와 민화부터 이백(李白), 두보(杜甫), 백거이(白居易), 소식(蘇軾), 서위(徐渭), 포화(蒲華), 반천수(潘天壽) 같은 명인들의 작품까지 100편의 시와 100폭의 그림을 놓고 하나하나 핵심을 명쾌한 언어로 풀이해 나간다. 이를 통해 고대부터 현대까지 2000여 년에 걸친 중국의 시와 회화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이 책은 본래 1990년대 중반 중국 상하이 교육방송에서 방영된 ‘시정화의(詩情畵意)’라는 프로그램의 강연 원고를 정리한 것이다. 이 프로그램은 경제 만능의 시대에 문학 예술의 전통이 무너져 가고 있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던 중국의 학계, 교육계, 방송국이 함께 나서서 인문정신의 부흥을 위해 만들어 냈다. 이들은 쉽지 않은 주제를 가지고 10분이라는 한정된 시간 속에 불특정다수를 대상으로 강의한다는 제약을 오히려 장점으로 활용했다.

이들이 제시한 방침은 “쉬운 것은 깊이 있게, 어려운 것은 쉽게”라는 것이었다. 시청자가 가볍고 편한 기분으로 시와 그림을 즐기며 감상할 수 있도록 하되 간결한 언어로 그 핵심을 짚어 준다는 것이다. 그 방법의 하나로 학생과 선생이 묻고 대답하는 형식을 취했고 그 문답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쉬운 언어로 수준 높은 감상의 묘미를 전달할 수 있었다.

18세기에 활동했던 화가인 화암(華암)의 ‘천산적설도(天山積雪圖)’를 보며 학생이 그 그림의 선명한 선과 명료한 색채에 감탄할 때 선생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나그네가 입은 붉은 외투가 얼마나 선명한지 마치 횃불처럼 얼음과 눈으로 뒤덮인 곳에 활달한 생기를 부여하고 있어.… 기러기와 나그네, 겨울 낙타가 비록 하나는 천산의 위에 있고 나머지는 천산의 아래에 있지만 그 감정과 뜻이 서로 통하고 있구나.… 이러한 따뜻한 색감은 추위를 녹이기에 충분하기 때문에 그림을 보는 이들은 다시 생명의 힘과 삶에 대한 깨달음을 얻게 된단다.”

한 폭의 그림을 놓고 만물 사이의 교감과 생명의 힘과 삶의 깨달음까지 오고가는 이들의 대화에 한 번 동참해 볼 만하다. 그러다 보면 2000여 년의 역사와 드넓은 중원의 산천을 넘나들며 시와 그림의 맛에 푹 빠질 수 있다.

김형찬기자·철학박사 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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