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에세이]정도언/순종교육과 위기대처능력

  • 입력 2003년 3월 10일 19시 2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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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지하철 방화참사를 보면 안타까운 점이 한둘이 아니다. 보안체계의 허술함은 재론할 필요조차 없다. 정신의학, 즉 인간의 마음과 행동을 연구하는 학문을 하는 입장에서는 지하철 방화참사의 과정을 사회심리학적 측면에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왜 그 많은 승객들 중 몇 명이라도 나서서 라이터를 꺼내서 인화물질이 든 통에 불을 붙이려고 하는 사람을 적극 제지하지 않았던가. 연기 또는 연기 냄새가 나는 객차 안에서 사람들은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을까. 왜 기관사는 이미 다른 전동차가 불이 난 채 서 있는 역 안으로 진입해야 했을까. 왜 기관사는 승객들을 버리고 도망갔을까.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러면서 우리 시대에 생명과 건강은 자신의 노력만으로 지키기 힘들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다.

전통과 문화는 우리의 사고와 행동의 방식을 규정한다. 서양인과 동양인의 행동이 다른 것은 유전자보다는 문화의 차이에 따른 결과이다. 문화적 차이 중에서도 사람의 사고방식을 결정짓는 요인은 사물을 인지하는 패턴이다. 연구 결과에 의하면 동양인은 사물을 인지할 때 전체에 더 무게를 두는 반면 서양인은 부분에 더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동양의 전통인 ‘집단 속에서의 개인’과 서양의 전통인 ‘개인으로서의 개인’을 대비시켜 주는 논리다. 전체를 중시하는 문화에서는 대리석 바닥의 화려한 전철역과 푹신한 쿠션이 깔린, 깔끔하게 보이는 전동차 내부가 만족감을 준다. 그러면 그 이상을 보려고 하지 않는다. 부분을 중시하는 문화에서는 푹신하지 않아도 불에 타지 않는 금속제 의자가 차라리 편안하다.

개인주의적 문화를 추구해온 서양의 전동차 안이었다면 아마도 피의자가 라이터를 켜려고 다시 시도하는 순간 남녀 구별 없이 여러 사람들이 그를 덮쳤을 것이다. 불이 나고 나서도 중앙통제실의 명령이나 기관사의 지시를 막연히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 판단에 따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피해 나왔을 것이다.

한 개인이 저지른 방화사건이 대규모 참사로 이어진 것은 부실한 내장재만의 문제가 아니다. 평소 지나치게 순종하도록 교육받아온 우리 문화의 부작용일 수 있다. 신체적 건강을 지키기 위한 노력도 중요하나 스스로 판단하고 독립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정신적 준비도 21세기의 복잡한 사회에서는 매우 중요하다.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집을 나가 자기가 벌어서 대학을 다니기 시작하는 서양의 젊은이들과 달리 아직도 우리나라에는 30세, 심지어 40세가 넘어서도 부모에게 얹혀 사는 ‘미성년’들이 너무도 많다.

지나친 순종심과 의존심도 건강을 해칠 수 있는 큰 병이다. 위기 상황에서는 독립적으로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행동이 튀지 않을까 하고 눈치 보는, 문화적으로 길들여진 성향이 결국 다른 사람이 아파서 길에 쓰러져 고통을 받고 있어도, 뻔히 보이는 위험이 눈앞에 닥쳐도 우리를 집단적 마비상태에 놓이게 하는 것이다.

대형 참사의 재발을 막기 위한 논의가 활발하다. 그러나 국민 개개인이 책임과 의무를 다해 스스로의 목숨과 건강을 지킬 수 있도록 아주 어려서부터 교육받지 않는다면 방화 체계를 완벽하게 갖춘다고 해서 재해를 완전히 예방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정도언 서울대 의대 교수·정신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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