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한기흥/그래도 살만한 한국

  • 입력 2003년 3월 9일 19시 1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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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미국에 눌러앉지 한국엔 왜 돌아왔습니까. 정 안되면 가족만이라도 두고 오지.”

지난달 중순 3년1개월의 워싱턴특파원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이후 주변에서 종종 듣는 말이다. 처음엔 그저 농담으로 치부했다. 그러나 같은 질문을 여러 번 받다 보니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외국인이 자기가 좋다고 그냥 눌러앉을 수는 없다. 물론 미국도 마찬가지다. 그런 사실을 알 만한 사람들이 미국에 눌러앉으라고 한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봤다.

‘왜 돌아왔느냐’는 말이 ‘그 좋다는 미국’에 3년 넘게 살면서 아예 눌러앉을 방법을 한번쯤 생각해 보지 그랬느냐는 말로 들렸다. 북한 핵문제로 미국이 북한을 공격하면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르는데 한국을 떠나 있는 것이 안전하지 않느냐는 충고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가족만이라도 두고 오지 그랬느냐’는 말에는 살벌한 입시교육 때문에 부모와 아이들이 모두 생고생을 할 텐데라는 걱정이 배어 있었다. 웬만한 중산층이라면 요즘 자녀들을 조기유학 보내려고 안달을 하고 있는데 아이들을 미국에서 계속 공부시킬 수 있는 좋은 조건을 포기하고 덜렁 서울로 돌아온 것은 바보 같은 결정이 아니냐며 안타까워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이런 반응들은 국가안보에 대한 불안과 국내 교육에 대한 불만이 얼마나 큰지를 실감케 했다. 또 반미감정이 확산되고 있지만 우리 국민 사이에 미국을 ‘현실 도피의 이상향’으로 보는 시각이 엄존하고 있음을 새삼 깨닫게 했다.

그렇다면 정말 미국은 무리를 해서라도 건너가 살 가치가 있는 나라일까. 유일 초강대국 미국을 동경하는 나라는 한국만은 아니다. 9·11테러 직후 미국이 오사마 빈 라덴 색출에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는 외국인들에게 ‘미국 시민권’을 포상으로내걸었던 것은 미국에 대한 선망이 국제적 현상임을 보여 준다.

그러나 현재 미국은 ‘태평성대’와는 거리가 멀다. 최근 워싱턴 일대에서는 추가 테러에 대한 우려 때문에 생필품 사재기 소동이 벌어졌다. 94년 북핵 위기 때의 한국 상황과 다를 바가 없다. 기자가 귀국에 앞서 미국 은행의 계좌를 폐쇄할 때 창구의 여직원은 “또 테러가 발생하기 전에 미국을 떠나는 것은 스마트한 결정”이라며 윙크를 하기도 했다.

미국의 교육비도 한국보다 많으면 많았지 절대로 적지 않다. 좋은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사립학교에 가야 하는데 사립학교에 내는 학비와 튜터(가정교사)에 드는 사교육비는미국의 중산층 가정도 버거워 한다. 예능과 체육 특별활동에 드는 비용도 결코 만만치 않다.

반면 한국은 수많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지난 몇 년간 나름대로 상당한 발전을 이뤘다. 미국시장에서 일부 한국 가전제품은 비슷한 품질의 일본제보다 비싼 값에 팔린다. 한국 자동차에 대한 조롱도 옛날이야기가 됐다. ‘코리안 드림’을 찾아 한국에 오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늘고 있는 것도 국제적으로 한국의 키가 많이 커졌음을 증명한다.

외국 생활을 해 본 사람들은 흔히 한국을 ‘즐거운 지옥’, 선진국을 ‘지루한 천국’이라고 말한다. 살기 힘들고 짜증이 나긴 하지만 한국 사람들에겐 역시 활력이 넘치는 한국이 좋다는 의미일 것이다.

아직은 이런 저런 이유로 한국을 떠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을지 모른다. 그러나 오랜만에 귀국한 사람들이 ‘왜 돌아왔느냐’는 말 대신에 ‘정말 잘 돌아왔다’는 인사를 받을 수 있는 날이 더 빨리 오기를 기대해 본다.

한기흥 정치부 차장 eligiu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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