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亞 내셔널 어젠다委 제안]<20>주거환경

  • 입력 2003년 2월 9일 19시 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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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버스, 시외버스, 좌석버스, 마을버스, 공항버스, 셔틀버스, 관광버스, 통근버스….

버스의 종류는 많다. 버스표지판의 수도 많고 이들을 관장하는 관공서의 부서도 많다. 온갖 가로 시설물의 종류는 훨씬 많다. 그리고 그만큼 도시는 혼란스럽다. 도시시설물을 관장하는 부서는 서울특별시만 해도 22개에 이른다. 이런 상황은 서울과 지방, 도시와 농촌이 다르지 않다.

전국의 온갖 관공서에서 각자 발주하고 설치하고 관리해 온 시설물들은 그만큼 체계 없이 국토에 뿌려져 있다. 도로, 철도, 전기 구조물들은 전국을 종횡으로 누비고 있다. 산업화시대의 기능적 논리만으로 만든 구조물들은 분명 우리가 살기에 편한 사회를 만드는 도구들이다. 그러나 다음 세대에는 국토를 황폐화시킨 주범들로 여겨질 것이다.

전 국민이 문화유산답사의 열기에 휩싸였을 때 국보로 지정된 석탑 주위에는 읍내 철공소에서 용접해온 출입금지 쇠난간이 세워져 있었다. 무지막지한 송전철탑이 그 너머 산자락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고속도로 어귀에서는 디자이너의 손길을 거쳤다고 보기 어려운 톨게이트가 전국의 도시 입구를 획일화시키고 있다. 이제 이들이 디자인의 대상으로 자리를 잡아야 할 시대가 됐다. 우리의 주거환경은 현관 내부뿐 아니라 국토 전반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에서 필요한 것이 국책환경디자인연구소다. 도시, 토목, 건축, 조경, 산업디자인 등의 배경을 가진 디자이너들이 연구원으로 초빙돼야 한다. 이 연구소는 학제간의 연구가 아닌 학제간의 디자인을 기본으로 한다. 고속도로변의 방음벽은 대학에서 무슨 전공을 한 사람이 디자인해야 하는지 모호하기 때문이다. 터널은 엔지니어가 설계하지만 터널 입구는 디자이너가 협력해서 설계해야 한다. 국토환경시설물의 디자인은 학제를 초월해야 한다.

이 연구소는 공중화장실부터 문화재 보호난간에 이르는 환경시설의 다양한 기본형을 디자인한다. 이런 디자인의 축적을 기반으로 이 연구소는 디자인뱅크의 역할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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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경관을 해치는 주범으로 도시에서는 아파트, 교외에서는 송전철탑이 거론된다. 아파트의 외관은 주택의 공급 문제만큼이나 복잡한 시장논리의 지배를 받고 있어서 당분간은 해결책이 나오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러나 송전철탑은 다르다.

더 이상 송전철탑이 현재와 같은 방법으로 세워져서는 안 된다. 모든 송전선이 지하에 매설될 수도, 모든 철탑이 조각품 같을 수도 없다. 그러나 중요한 지점에 세워지는 송전철탑은 기능적인 요구조건을 넘어서는 아름다운 구조물이 돼야 한다. 현상공모를 통해 그 디자인을 얻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철도나 도로를 책임지는 기간산업체에서 만드는 시설의 구조물들도 역시 같은 예가 된다. 일정과 예산의 문제 때문에 현상공모로 디자인을 진행하기 어려운 구조물의 경우에는 국책환경디자인연구소의 힘을 빌려 작업을 진행토록 해야 한다.

지방자치단체에서 진행하는 작업도 마찬가지 과정을 거치게 해야 한다. 물론 중앙의 환경디자인연구소에서 디자인한 도시시설물이 여과 없이 설치되면 전국의 도시는 정체성 없는 도시가 된다. 필요에 따라서 디자인뱅크가 가지고 있는 기본형의 하나를 선택해 이를 각각의 도시환경에 맞게 변형시켜 제작 설치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선택된 구조물의 디자이너에게는 로열티를 지급하게 하자. 산업연구소가 그렇듯이 디자인연구소에도 병역특례가 주어져서 젊은 디자이너들을 끌어 모아야 한다. 이런 인센티브를 통해 국제경쟁력이 있는 디자인의 발판이 마련된다. 아울러 각 지방자치단체에는 디자인 관리전담부서가 설치돼야 한다. 이 부서가 집중적으로 도시시설물의 발주, 설치, 관리를 책임지게 해야 한다.

행정투명성 확보의 일환으로 유지되고 있는 전자입찰은 디자인이 필요한 도시시설물의 경우에는 예외로 인정돼야 한다. 최저가로 낙찰을 하게 되는 경우에는 가장 먼저 삭감되는 것이 디자인에 필요한 금액이다. 영세한 도시시설물제작업체는 결국 디자인이 빠진 구조물을 도시에 만들어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책임은 바로 우리의 몫이다.

대표집필 서 현 한양대 건축디자인대학원 교수

▼도심속 빈공간 문화재로 지정▼

지금까지 우리는 짓기만 했다. 땅을 비워둔다는 것은 대단한 낭비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어떤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도시가 점차로 비워지고 있다. 서울의 경우만 해도 행정수도 논의로 뜨겁다. 지방 도시에서는 이미 도청사 이전 등으로 도심 내 공백이 심심찮게 생겨났다. 여기에 공업시설의 시외 이전, 인구의 도심 이탈 등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 도심 공동화는 더 이상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거시적으로 보면 사회 변화로 인한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회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도시는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비워진 곳을 다시 무리하게 채우려 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채움’이 아닌 ‘비움’의 소중함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공원, 길, 광장, 강, 바다, 녹지, 이런 것들이 바로 도시의 비워진 부분들이다. 그것들의 소중함을 새삼 말할 필요가 있으랴.

나아가 이렇게 비어있는 부분을 소중히 보존하는 문제를 생각해보자. 그 한가지 예로 도시의 골목길을 문화재로 지정할 것을 제안한다. 서울의 경우, 강북의 골목길들은 종종 수백년의 역사를 갖는다. 고지도에 나타난 골목길의 패턴이 지금과 정확히 일치하는 경우도 많다. 건물보다 길이 더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길, 광장 등 비어있는 곳을 문화재로 지정하는 것은 외국에서는 보편화된 역사 보존의 한 방식이다.

우리는 회화에서도 여백의 미를 소중히 해 왔다. 이제는 우리의 도시가 그렇게 변화할 때다. 우리가 ‘비움’을 소중히 할 때, ‘채움’도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황두진 건축사사무소 대표·건축가

▼전봇대 없는 청정강산을▼

얼마 전 모 방송국에서는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영화를 방영해 주었다. 죽음을 앞둔 노인이 잔디 깎는 기계를 타고 먼 곳에서 살고 있는 동생을 찾아 길을 나서는 내용이다. 이 독특한 ‘로드 무비’는 미국 중서부의 시골지역을 공간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전봇대를 하나도 볼 수가 없었다.

이런 영화가 한국에서 만들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무조건 ‘전봇대 로드 무비’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거의 모든 찻길이 ‘전봇대 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실 찻길만이 아니다. 추수 끝난 빈 들판에 전봇대만 어지럽게 널려 있는 모습을 어디서고 쉽게 볼 수 있다. ‘논둑 밭둑 지나서, 옥수수밭 지나서, 오솔길을 지나서’ 전봇대들이 제멋대로 박혀 있는 것이다.

물론 전봇대로 말미암은 문제는 도시에서 더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 전봇대가 곳곳에 멋대로 들어서 있다는 것은 전깃줄이 공중에서 멋대로 이어 달리고 있다는 뜻이다. 그 결과 우리의 도시는 더욱더 볼썽사나운 곳이 되고 말았다. 전깃줄을 보호하기 위해서 가로수를 학대하는 행위도 전국의 모든 곳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저질러지고 있다. 거대 송전탑은 지역사회에 파괴적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한전 배전팀장의 설명에 따르면, 전국에 750만개의 전봇대가 박혀 있고, 지구를 25바퀴나 돌 수 있는 전깃줄이 설치돼 있다. 그 결과 전봇대나 전깃줄을 피해서 사진 한 장 제대로 찍기도 쉽지 않을 정도이다. 이 때문에 한국영화 ‘아름다운 시절’은 전봇대를 뽑고 찍었다고 한다. 언제까지 이런 후진적 방식으로 전기를 이용해야 하나.

정말 선진국이 되고자 한다면, 전봇대 공해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전봇대를 뽑고 가로수를 심어야 한다. 전깃줄을 땅에 묻고 경관을 살려야 한다. 전기를 싼값으로 쓰기 위해 마땅히 들여야 할 비용을 들이지 않는 천박한 성장제일주의 시대는 이제 끝내야 한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니 당장 시작해야 한다.

홍성태 상지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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