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포럼]유종호/절반개표, 고대비극의 지혜

  • 입력 2002년 12월 29일 17시 58분


“숫제 태어나지 않은 것이 최고다.” “세상에 경이는 많다. 그러나 가장 찬란한 경이는 인간이다.” 모두 소포클레스의 비극에 나오는 합창대의 대사다. 인간사치고 고대 그리스 비극이 건드리지 않은 구석은 없다.

3대 비극시인이라는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는 약 300편의 비극을 썼으나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것은 33편에 불과하다. 그 밖에도 이름이 전해오는 비극시인의 수는 150여명이나 된다. 이들의 작품은 단 한 편도 남아있지 않다.

▼10표중 5표만 열어 승자결정▼

고대 그리스 비극은 도시국가 아테네에서 디오니소스 축제의 일환으로 발전한 것이다. 3월 말 포도주와 도취의 신 디오니소스를 기리는 축제가 열렸다. 제물을 바치고 국가 유공자를 칭송하고 전사자의 아들 중 성년에 도달한 청년들의 무장 행렬이 있었다. 그러나 가장 주요한 행사는 비극의 경연(競演)이었다. 하루에 한 작가의 비극 3편과 가벼운 소극(笑劇) 한 편을 상연했고 그것이 사흘 동안 계속되었다.

비극은 아크로폴리스 남쪽의 야외극장에서 상연되었다. 관객석의 수용 인원은 1만4000명을 웃돈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한때는 무료로 상연되었고 한때는 입장료를 받았으며 심지어 관람객에게 상여금을 주는 시기도 있는 등 변화를 겪었다. 극장이 국가의 교육기관임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해마다 새 작품만을 상연했고, 아테네의 쇠퇴를 초래한 근 30년에 걸친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에도 경연이 중단되는 법은 없었다. 그만큼 중요한 국가 행사였다.

경연인 만큼 심사원이 필요했다. 10개 부족이 각각 약간 명의 후보자 명단을 제출하면 그 명찰을 10개의 항아리 속에 밀폐해 아크로폴리스에 보관한다. 경연이 시작되면 그 항아리를 극장으로 운반하고 비극 상연을 감독하는 집정관이 그 10개의 항아리에서 명찰 하나씩을 무작위로 끄집어낸다. 이렇게 선발된 10명의 심사원이 경연에 참가한 이들 가운데서 우수작가를 투표한다. 그러면 집정관은 다시 이 가운데 아무렇게나 5표를 골라 우수작가를 선정한다. 나머지 5표는 사표(死票)가 된다.

절반 개표로 최다 득표자를 가려 우승자를 결정하는 것은 확실히 우리에겐 낯선 관행이다. 따라서 많은 연구자들이 그 이유를 추측하는 가설을 내놓았다. 현재로선 부정을 방지하기 위한 조처였다는 추측이 우세한 것 같다. 10표를 모두 개표할 경우 6명만 매수하면 우승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5표를 개표할 경우 8명을 매수해야 하니 그만큼 부정행위는 어려워진다. 또 10표를 모두 개표하면 누가 누구를 찍었는지 관계자가 알 수도 있다. 그러면 협박 등이 나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 우리는 그 진상을 알 수 없다. 죽은 자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결과를 통해 그 이유를 추측할 수도 있다. 절반 개표에 의한 판정은 선정의 우연성을 부각시킨다. 또 판정의 오류 가능성과 자의성을 돋보이게 한다. 10표 전체의 개표는 전혀 다른 결과를 빚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승자는 자신의 행운에 감사하며 과도한 오만이나 자만심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패자들 역시 과도한 열패감이나 자괴감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패자에게는 위로를 안겨주고 승자에게는 겸손의 필요를 알려준다.

그리스 비극의 전범인 ‘오이디푸스왕’에서 주인공의 비극적 결함은 모든 것을 남김없이 알아내려는 고집불통의 의지였다. 그것은 신의 영역에 대한 잠재적 침범이었다. 그리스인들은 그것을 ‘휴브리스’라 불렀다. 미지의 부분이 수두룩한 것이 인간사라는 함의를 가지고 있는 절반 개표는 비극 판정에 어울리는 ‘비극적 지혜’일지도 모른다.

▼인간의 오만 경계한 관행▼

‘우연은 운명의 논리’라는 말이 있지만 경기의 승부가 운에 따라 좌우된다는 것을 월드컵 때 실감했다. 경기를 줄곧 리드하고도 승리하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올림픽 경기 같은 때 권투나 레슬링 승자가 껑충껑충 뛰면서 링을 몇 바퀴 도는 것을 볼 때마다 그리스 비극의 판정 관행을 떠올리게 된다. 패자 앞에서 보이는 그 막무가내의 동물적 희열은 자연스럽기보다는 치사하다는 느낌을 준다. 다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유종호 연세대 특임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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