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 2002-10大 변수]兵風…單風…核風…바람 거셌다

  • 입력 2002년 12월 19일 18시 21분


《16대 대선은 ‘혼미(昏迷)’ 그 자체였다. 우여곡절 끝에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민주당 노무현(盧武鉉) 후보의 양강 체제가 굳어졌으나 막판까지도 결과를 예측하기 힘들 만큼 숱한 고비와 사건으로 점철된 선거였다. 》

①노-정 공조파기〓 국민통합21 정몽준(鄭夢準) 대표가 선거를 하루 앞둔 18일 밤 전격적으로 노 후보와의 공조를 파기하고 지지를 철회, 대선 판도가 난기류에 휩싸였다.

정 대표측이 노 후보의 대북관 및 정 대표에 대한 ‘모욕적’ 언사를 문제삼아 국정운영 공조 합의 닷새 만에 파기하고 나선 것이다. 공조 파기가 가져올 ‘후(後) 폭풍’에 대한 양 진영의 계산은 엇갈렸다.

선거운동 기간 내내 각종 여론조사에서 이 후보를 앞서면서 승리를 낙관하던 민주당은 공조 파기라는 ‘돌출변수’에 망연자실하면서도, 노 후보 지지세력의 결집 효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민주당은 정 대표에 대한 비난 발언을 자제한 채 끝까지 공조는 유지돼야 한다는 입장을 거듭 밝혔다.

반면 한나라당은 “예상됐던 결별”이라며 선거에 유리한 영향을 가져올 것으로 기대하는 모습이었다.

②노-정 후보단일화〓 후보단일화는 양강 구도를 구축하는 계기가 됐다. 단일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여론조사 방식에 합의했으나 정 대표측이 합의내용 유출을 이유로 재협상을 요구하는 등 협상 결렬 위기를 맞기도 했다.

가까스로 여론조사 방식에 재합의한 양측은 TV토론을 거쳐 11월 24일 여론조사에 들어갔고, 노 후보가 리서치 앤 리서치(R&R) 조사에서 46.8%를 얻어 정 대표(42.2%)를 따돌림으로써 단일화가 이뤄졌다.

후보단일화는 ‘이회창 대세론’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메가톤급 위력을 발휘했다. “노 후보가 당선되도록 열심히 돕겠다”는 정 대표의 승복 선언은 ‘불복 정치’에 신물이 난 국민의 관심을 촉발시켰고 노 후보의 지지율은 20% 초반대에서 40%대로 수직 상승했다.

③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 개정 시위〓 올 6월 두 여중생이 미군 장갑차에 치여 사망한 사건으로 기소된 미군 2명에게 11월 말 미군 군사법정이 무죄 평결을 내리면서 SOFA 개정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됐고 ,일부에서는 반미 및 미군철수 주장까지 제기되는 상황으로 발전했다.

이 문제가 최대의 사회적 이슈로 등장하자 대선 후보들도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직접 사과를 요구하는 등 동참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이회창 후보가 SOFA 개정 요구서에 서명하고, 노 후보는 반대하는 ‘예상외의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각각의 취약층인 젊은층과 보수층 표를 의식했기 때문이었다.

투표일을 닷새 앞두고 전국적인 촛불시위가 벌어지자 각 후보측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불안을 느낀 한나라당은 배후에 반미 조장세력이 있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④행정수도 이전 논란〓 대선 중반전 이후를 달군 최대 쟁점이다. 노 후보가 청와대와 정부 청사, 국회를 충청지역으로 옮기겠다는 행정수도 이전 공약을 내놓자, 한나라당은 즉각 ‘수도권 집값 폭락’ 등의 논리로 맞대응했다.

수도권은 전체 유권자의 47%를 차지하고 있고, 충청권은 대선 판세를 좌우하는 전략지역이었기 때문에 이 문제를 놓고 양당은 사활을 건 공방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이회창 후보는 “수도권은 공동화되고, 집값 폭락과 경기 침체를 야기해 서민들이 애를 먹게 된다”고 공격했다. 노 후보는 “50만명이 빠져나간다고 수도권이 공동화되느냐. 오히려 쾌적하게 살 수 있다”고 맞섰다.

⑤북 핵동결 해제 및 미사일 어선 나포〓 15기의 스커드미사일을 싣고 예멘 근처의 인도양을 항해하던 북한 화물선 한 척이 12월 9일 스페인 해군에 나포된 뒤 미국에 넘겨지면서 ‘미국발 신(新) 북풍’이 불어닥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됐다. 그러나 미국이 곧바로 북한 선박을 풀어줌으로써 이 문제는 곧바로 진화됐다.

그러나 북한 화물선 나포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인 12일 북한이 핵동결 조치를 해제하고 핵시설을 즉각 재가동할 것이라고 발표, 한반도 주변상황이 93, 94년에 이어 두 번째 핵위기를 맞게 되는 것 아니냐는 위기의식이 고조됐다.

이 후보는 현 정권과 노 후보의 대북 저자세가 핵 위기를 초래했다며 현금지원 중단을 촉구했고, 노 후보는 이 후보를 전쟁론자로 몰아붙였다.

⑥국민참여경선과 노풍(盧風)〓 3월 9일 제주에서 시작해 4월 27일 서울에서 끝난 민주당의 국민참여경선은 ‘16부작 드라마’라는 얘기를 들을 정도로 국민적 관심을 받으며 ‘새로운 정치 문화’의 가능성을 열었다.

선관위원장이었던 김영배(金令培) 의원은 “매 주말 수 천만개의 눈과 귀가 (경선 결과를 발표하는) 내 입을 주시하고 있다”고 말하곤 했다.

노 후보는 3월 16일 광주 경선에서 일반의 예상을 깨고 1위를 차지하면서 ‘이인제(李仁濟) 대세론’을 꺾었다. 노 후보의 광주 승리는 곧바로 ‘노풍’(노무현 바람)으로 이어졌다. 노 후보는 그 후 상대 후보의 색깔론 음모론 공세에 “대통령이 되려고 아내를 버리면 용서하시겠습니까”라는 식의 직설 화법으로 맞서 한때 여론조사 지지도가 50%를 웃돌 정도로 국민적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⑦국정원 도청 논란〓 한나라당은 11월 28일과 12월 1일 국가정보원이 국회의원과 언론사 사장, 기자, 청와대 고위관계자와 장관 등의 전화 통화내용을 무차별적으로 불법 도청했다고 주장하며 관련 자료를 잇달아 공개해 큰 파장을 일으켰다.

한나라당은 현 정권이 온 국민을 감시하고 있다고 비난하며 대선에 관계없이 이 문제를 철저히 파헤치겠다고 별렀다. 한나라당은 또 관련 자료를 토대로 노 후보가 올 봄 국민경선 과정에서 청와대와 국정원 등 여권의 조직적인 지원을 받았다고 주장하며 노 후보의 정통성과 도덕성에 흠집을 내려고 했다.

민주당은 한나라당이 정보기관 출신인사들을 동원해 꾸민 정치공작이라며 자료의 출처와 제보자를 공개하라고 맞섰다. 하지만 네거티브 선거전략이라는 부정적 여론이 일어나면서 한나라당은 예고했던 3차 폭로를 포기했다.

⑧한나라당 내홍 및 수습〓 2, 3월 한나라당 이회창 당시 총재는 내우외환의 최대 위기를 맞았다.

안으로는 당내 소장파 의원들의 개혁 요구에 직면했고, 밖으로는 민주당 설훈(薛勳) 의원의 호화빌라 공세에 휘청거렸다.

박근혜(朴槿惠) 의원은 이 총재의 당 운영방식을 비판하며 당을 떠났고, 당내에는 ‘제왕적 총재’에 대한 비판과 함께 집단지도체제 도입 요구가 비등했다. 동시에 민주당은 손녀를 미국에서 원정출산했다며 ‘귀족’ 공세를 거세게 펼치는 바람에 이 총재의 지지율은 20%대까지 떨어졌다.

이 총재는 3월 19일 기자회견을 통해 5월 전당대회 후 총재권한대행체제를 출범시키겠다고 약속했고, 1주일 뒤의 2차 기자회견을 통해서는 집단지도체제 도입과 총재직 폐지까지 약속해야만 했다.

가족 문제에 대해서도 이 총재는 국민에게 사과하고 이후 서울 옥인동으로 이사를 가는 등 홍역을 치렀다.

⑨2차 병풍공방〓 97년 대선에서 이 후보의 장남 정연(正淵)씨의 병역면제 의혹을 터뜨렸던 민주당은 이번에도 이 후보 아들 병역비리진상위원회를 가동하는 등 병풍(兵風) 의혹을 거듭 제기하며 선거 쟁점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지난 대선 때 이 후보를 낙선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병풍 의혹은 2라운드에 접어든 이번 대선에서는 이 후보 지지율 상승을 막는 데는 어느 정도 기여했으나 승패를 가르는 결정적 ‘호재’가 되지는 못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미 한번 써먹은 메뉴였던 데다 민주당이 추가로 제시한 의혹도 구체적인 증거가 뒷받침되지 않아 국민의 관심을 끌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한편 검찰은 2차 병풍을 불러일으킨 김대업(金大業)씨가 병역비리 증거라며 내놓은 테이프가 조작된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⑩노무현 흔들기〓 노 후보는 대선 전초전이라 할 수 있는 6·13 지방선거, 8·8 재·보선에서 참패함으로써 후보 지위를 위협받았다. 노 후보는 재경선 수용이라는 카드로 정면 돌파를 시도했으나 민주당의 신당 창당 및 재경선은 무산됐다. 9월 30일이 돼서야 가까스로 중앙선대위를 출범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민주당 내홍(內訌)은 갈수록 심해졌다. 10월 들어 비노(非盧)-반노(反盧) 그룹들과 친노(親盧) 세력간의 갈등이 노골화됐고, 비노-반노 의원들 중심으로 후보단일화추진협의회가 결성돼 자민련, 정몽준 대표, 이한동(李漢東) 전 국무총리 등과의 4자 연대를 추진하는 등 노 후보를 압박했다. 4자 연대는 무산됐지만 후단협 소속의원 16명을 비롯해 18명이 집단 탈당하는 등 분당(分黨) 사태까지 빚어졌고 결국 노 후보는 후보단일화 요구를 수용하게 된다. 반노 진영의 수장인 이인제 의원은 탈당, 이회창 후보를 지지하고 나섰다. 정용관기자 yongari@donga.com

윤종구기자 jkmas@donga.com

부형권기자 bookum9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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