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이명재/현대의 구멍가게식 경영

  • 입력 2002년 11월 17일 19시 50분


현대그룹 전현직 전문경영인과 오너 일가 사이에 이전투구가 벌어지고 있다.

이익치(李益治) 전 현대증권 회장이 국민통합21 정몽준(鄭夢準) 대통령후보를 공격하면서 촉발된 비방 폭로전은 이 전 회장에 대한 김충식(金忠植) 전 현대상선 사장의 비판이 가세하면서 점입가경으로 치닫는 양상이다.

한때 한솥밥을 먹으면서 가족 같은 우애를 과시하던 이들이 왜 이렇게 ‘순식간에’ 갈라섰을까.

일단 그룹 사정이 어려워지고 정치적 의혹에 휘말린 와중에 각자 살아남으려는 생존싸움의 성격이 짙다.여파가 크지만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현대 특유의 기업문화에서 비롯된 면도 커 보인다.

현대는 국내 대기업 가운데 유난히 ‘인치(人治)’에 의존한 경영 스타일이 두드러진 기업이었다. ‘왕회장’으로 불린 작고한 창업주(정주영 전 명예회장)의 카리스마가 그룹을 지배했다.

대담한 의사결정이 필요한 고도성장기의 상황이나 건설업 위주의 속성이 인치를 필요로 한 측면도 있었다. 그룹이 한창 뻗어나가고 순항하던 시기에는 이런 인치경영이 나름대로 강점을 발휘했다.

하지만 그룹의 덩치가 커졌는데도 이런 행태를 고수했다는 데 문제가 있다. 능력보다는 오너의 일방적인 판단에 의한 ‘정실인사’가 잦았다는 평가다. 몇몇 전문경영인들은 왕회장의 총애를 발판으로 중용됐다는 비난을 받았다.

현대의 한 전직 임원은 “주력 계열사의 현 경영진 가운데 몇 명은 도저히 그 자리에 올라서는 안 될 사람이 발탁돼 임직원들이 놀랐을 정도”라고 말했다.

여기에 형제간 후계구도가 복잡하게 얽히고 주군(主君)을 따른 ‘줄서기’가 복잡하게 펼쳐지면서 조직의 건강이 결정적으로 훼손됐다.

이런 균열 요인들은 왕회장의 통치 하에서는 잠복해 있었지만 권력이 진공상태에 빠지자 한꺼번에 수면으로 떠오르며 후유증을 낳고 있는 것이다.

구멍가게가 중소기업이 되고 중소기업이 대기업이 되는 건 덩치만 키워 되는 일이 아니다. 현대는 극단적으로 말하면 ‘큰 구멍가게’였을 뿐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외환위기 이후 선진적 경영형태로 변모 중인 다른 국내 대기업들은 과연 얼마나 ‘구멍가게’로부터 벗어난 것일까.

이명재기자 경제부 mj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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