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허영/´자백강요´ 언제까지…

  • 입력 2002년 11월 5일 18시 28분


법무장관과 검찰총장을 물러나게 한 검찰에서의 피의자 고문치사 사건은 참으로 충격적이다. 인권정부를 내세우면서 국가인권위원회까지 만든 이 정부의 검찰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법무장관과 검찰총장이 사표를 내고 물러나는 것으로 끝낼 일이 결코 아니다. 공권력을 대표하는 대통령이 국무회의가 아닌 국민 앞에서 진솔하게 참회의 사과를 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해야 할 일이다. 또 법무장관과 검찰총장의 후임 인선에서 재발방지를 위한 대통령의 확고한 의지를 국민이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제도개혁이 필요하면 제도도 서둘러 뜯어고쳐야 한다. 수사기관의 의식개혁이 요구되면 의식개혁을 위한 교육프로그램을 하루속히 만들어 실천에 옮겨야 한다.

▼검찰의 인권경시 심각▼

헌법에서 금지하는 피의자의 불리한 진술거부권이 죽음에 이르는 가혹한 고문으로 사문화되는 등 심각한 인권침해가 공공연하게 자행되고, 헌법에서 명령하는 적법절차도 수사과정에서 지켜지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수사기관의 고질적인 권위의식과 인권경시 풍조 때문이다.

‘열 사람의 범인을 놓치더라도 한 사람의 인권보호가 더 중요하다’는 서양의 법언은 우리 수사기관에는 한낱 잠꼬대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헌법이 정하는 무죄추정 원칙, 불구속수사의 원칙 등은 규범력을 상실한 채 무시되기 일쑤다. 체포 또는 구속된 피의자에게 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헌법상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제는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한다. 인간의 존엄성 보호를 최고의 통치목표로 천명하고 있는 우리 헌법질서 아래에서 고문은 이제 완전히 추방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법을 강화해서라도 피의자에게 변호인의 도움을 확실하게 보장해줘야 한다. 그래서 체포 또는 구속된 피의자는 원하는 경우 변호인의 입회 아래에서만 수사를 받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만 고질적인 강압수사나 가혹행위가 근절될 수 있다. 그리고 ‘잠 안 재우기’와 같은 지능적인 고문을 막기 위해 수사기관의 심야수사는 법으로 금지해야 한다. 이 두 가지만 보장된다면 수사과정에서의 인권침해는 획기적으로 줄어들 것이다. 정부는 백 마디 말보다 이 두 가지 실효성 있는 고문 근절 대책을 서둘러 도입해야 한다.

고(故)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비롯해 고문치사 내지 인권침해 사건이 터질 때마다 관련 책임자들을 문책하고 재발 방지를 형식적으로 약속하는 것으로 넘어가는 일이 이번에도 되풀이돼서는 곤란하다. 그러기에는 이번 사건의 충격이 너무나도 크다. 이번 사고는 과거 경찰과 정보기관의 관행적인 인권침해 사례와는 그 본질이 다르다. 인권의 파수꾼인 검찰이 피의자를 고문해서 죽게 했다는 것은 어떤 변명으로도 정당화할 수 없는 중대 사건이다.

단순한 교통사범을 비롯해 흉악범에 이르기까지 공권력을 무시하고 우습게 보는 풍조는 위험수위에 이르고 있다. 그들의 눈에 비친 수사기관은 모두 제 구실을 못하고 엉뚱한 일에 정신이 팔려 있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권력을 등에 업은 범죄에는 맥을 못 추거나 한없이 관대하면서 돈 없고 힘없는 서민들에게만 추상같은 법의 잣대를 들이미는 수사기관의 행태를 그들은 업신여기게 되는 것이다. 검찰을 비롯한 모든 수사기관이 제 자리를 지키고 누구에게나 공평한 법의 잣대를 적용한다면, 누가 감히 공권력에 도전하는 만용을 부리겠는가. 이 점 검찰이 깊이 반성할 일이다.

▼과학수사 새 틀 짜는 계기되길▼

법조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법원도 이번 사건을 계기로 앞으로 인권침해적 강압수사 의혹이 제기되는 검찰의 수사기록에 대해서는 그 증거능력을 과감하게 제한하는 판례를 확립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간접적으로 검찰의 강압수사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

나아가 우리 수사기관은 지나치게 피의자의 자백에 의존하는 원시적인 수사관행에서 벗어나야 한다. 증거중심의 선진적 과학수사 기법을 훈련하고 실천할 필요가 있다. 고문과 인권 침해 없는 과학수사를 일상화하고 있는 인권선진국의 범죄 해결률이 우리보다 높다는 통계수치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번 사고가 우리의 인권수준을 세계 선진대열로 끌어올리는 전환의 기폭제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허영 명지대 초빙교수·헌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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