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심규선/日 닮은 교과서 변명 ˝부끄럽습니다˝

  • 입력 2002년 8월 4일 18시 19분


지난해 꼭 이맘때쯤 도쿄특파원으로서 일본의 왜곡 역사교과서를 비판했던 필자로서는 요즘 한국의 역사교과서 파문이 매우 부끄럽다. 청와대나 교육인적자원부 등에서 내놓고 있는 해명이 당시 일본의 총리실이나 문부과학성에서 했던 변명과 너무나 비슷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하면서 남에게만 돌을 던진 것이 아닌가 하는 자괴감마저 든다.

일본 역사교과서 파문의 핵심은 일부 역사교과서가 일본의 전쟁과 가해 책임을 오히려 미화했으며, 문부과학성이 이를 그대로 통과시켰고, 일본 정부는 한국의 ‘정당한’ 수정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시 일본 총리실은 “문부과학성의 소관사항이다”고 책임을 회피했고, 문부과학성은 “근현대사 부분에는 인식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오류는 없다”며 수정을 거부했다. 한국측은 범정부 차원의 ‘역사교과서 왜곡대책반’을 만들어 일본 정부를 성토하고, 직권으로라도 내용을 바꾸라고 맹공을 퍼부었다.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검정 교과서 ‘한국 근현대사’의 쟁점사항이나 진행과정도 다를 것이 없다. 문제의 교과서들이 현 정권의 업적을 미화했고, 교육부는 이를 그대로 인정했다는 것이다. 수정 여부는 좀 더 지켜볼 일이다.

청와대는 “우리도 교육부에 유감의 뜻을 표했다”며 관련이 없음을 강조했고, 교육부는 “검정위원들의 검정 결과를 수용했을 뿐이다”고 주장했다. 일본측 해명과 너무 닮았다. 일제의 침략과 정권 미화 문제가 같을 수 있느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역사를 기록하는 자세에 차이가 있을 수 없다.

이런 파문이 빚어지는 분위기도 문제다. 일본의 왜곡 역사교과서는 “일본은 잘못한 것이 없다”고 확신하는 우익 인사들이 쓴 책이며 그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숨기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 근현대사를 쓴 필자들이 김대중(金大中) 정권이 미화를 해야 할 만큼 큰 업적을 남겼다고 생각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단지 합격하기 위해서 미화를 했다면 검정 과정의 어딘가에 건전치 못한 분위기가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일본의 왜곡교과서는 검정을 통과하긴 했어도 채택률은 0.039%로 학생들의 손에는 거의 넘어가지 않았다. 한국 정부는 이를 “양심적인 일본 국민의 승리”라고 고마워했다. 그러나 이번에 검정을 통과한 문제의 역사교과서들은 곧바로 고교생들의 교재가 될 판이다.

이 문제는 하루빨리 정권 차원에서 풀어야 한다. 한국은 ‘한일 역사공동연구기구’를 만들 때 반대하는 일본측을 설득해 정부 관계자들을 멤버로 참여시켰다. 이유는 간단했다. 일본 정부측에 책임을 지우고 발뺌을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일부에서는 정부가 교과서 검정에 너무 깊숙이 관여하는 것은 자율검정의 취지를 훼손할 우려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이는 잘 될 때의 일이다. 이번 문제에 대해 교육부가 ‘잘못됐다’는 명백한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면 다음 정권에서도 똑같은 문제가 발생할 것이 틀림없다. 소모적인 악순환은 막아야 한다.

다만 이번 문제를 정쟁의 대상으로만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해 두고 싶다. 역사 기술의 문제는 모든 이들이 머리를 맞대고 풀어야 할 ‘한국’의 문제이자, ‘한국의 양식’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어느 정파의 전리품이 아니다.

심규선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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