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박혜윤/´호르몬´ 관행 바꾼 女원장

  • 입력 2002년 7월 17일 18시 41분


미국 국립보건원(NIH)이 복합호르몬 대체요법(HRT)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연구결과를 발표해 큰 충격을 주고 있다. 폐경기 여성을 위한 이 호르몬요법이 유방암과 심장발작, 뇌중풍 등 심각한 부작용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것.

호르몬요법은 그동안 화끈거림, 식은땀 등 폐경기 증상을 완화시킬 뿐만 아니라 골다공증 성욕감퇴 등 노화현상을 막아주는 만병통치약처럼 여겨져 왔다. 이 때문에 미국에서는 1350만명, 국내에서도 50만명 정도가 길게는 수십년간 이 요법에 의지해 왔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드는 의문은 이토록 대중적인 치료제의 치명적 부작용이 어떻게 지금에 와서야 밝혀졌느냐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뉴욕타임스 15일자 칼럼은 “최초의 여성 NIH원장이었던 버나딘 힐리 박사의 고집 덕분에 지금에라도 가능했다”고 소개했다.

호르몬제의 위험성에 대한 경고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똑같은 위험성을 지적한 ‘수전 러브 박사의 호르몬 북’이 97년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저자인 러브 박사는 보수적인 미국 의료계에서 신세대 이단아로 치부되고 말았다.

힐리 박사가 호르몬요법의 위험성을 제기한 것은 그보다 빠른 91∼93년 NIH 원장 재임시절이었다. 그는 여성건강이 연구 주제에서 소외돼 왔다고 주장하고 ‘여성건강 프로젝트’를 만들고 호르몬 요법의 문제점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그 과정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었다. 의학 또는 과학연구 분야에서 국가기관이 ‘여성’이라는 특정 집단만을 위한 연구를 하게 되면 문제가 정치화될 수 있다는 지적이 쏟아졌다. 그러나 힐리 박사는 물러서지 않았다. 의학연구에서조차 성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소신이었다.

이제 호르몬제를 처방하는 미국의 의사들은 환자들에게 그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기 시작했다. 또 단순히 노화방지용으로 알고 이 약을 복용해 왔던 여성들은 그 부작용에 대해 알게 됐다. 한 여성 의료기관장의 ‘고집’이 누구도 크게 의심하지 않았던 호르몬요법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킨 것이다.

박혜윤기자 국제부 parkhyey@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