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보르헤스와 편하게 대화하세요

  • 입력 2002년 7월 5일 17시 39분


1980년대 비정치적이며 비민중적인 작가라는 이유로 민중문학계에서 외면당했던 아르헨티나 작가 보르헤스가 세월이 흘러 많은 문학비평가와 작가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아직까지 제3세계 문학으로 간주돼 이렇다 할 비평서가 없는 상황에서 최근 송병선씨(한국외국어대 강사)가 ‘보르헤스의 미로에 빠지기’(책이있는마을) 라는 해설서를 펴냈다. ‘보르헤스 삶과 작품 독법’을 주제로 쓴 송씨의 글을 소개한다. <편집자>

보르헤스(1899∼1986)는 세계 문학사에서 너무나 잘 알려져 있어서 더 이상 소개가 필요 없는 인물이 되어 버렸지만, 우리에게는 아직도 어렵고 생소한 작가로 느껴진다. 보르헤스는 소설집 ‘픽션들’(1944)과 ‘알렙’ (1949)에 수록된 33편의 단편으로 20세기 후반의 문학뿐만 아니라, 철학, 역사학, 과학 등의 패러다임을 변화시켰고, 그래서 20세기 지식인치고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말해질 정도다.

일반적으로 위대한 작가들이 격정적인 삶을 산 것과는 달리, 보르헤스의 삶은 단조롭다. 그에게는 뜨거운 사랑도 힘든 역경도 많지 않았다. 그의 삶은 책과 함께하는 삶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책에 둘러 싸여 자랐으며, 이후에도 책은 항상 그의 동반자이며 작품의 주제가 된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미로, 거울, 도서관, 백과사전 등의 형이상학적 주제로 가득 차 있다. 대표작은 1940년대에 출판된 ‘픽션들’과 ‘알렙’ 에 대부분 수록되어 있다. 1950년대 이후 보르헤스는 시력을 잃어 버리면서 거의 20년 동안 단편소설을 쓰지 않다가 1970년대에 들어 단편소설집 ‘브로디의 보고서’(1970)와 ‘모래의 책’(1975)을 출판한다.

세계 문학적 관점에서 볼 때, 보르헤스 작품의 의미는 ‘문학적 글쓰기 행위에 대한 문제 제기’와 ‘정교하고도 복잡한 철학 사상’을 주제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이 세상에 새로운 것은 없다’고 주장하면서 기존의 주제를 재활용하는 글쓰기 행위는 새로운 주제를 찾지 못해 소설의 죽음을 외치고 있던 1960년대의 유럽과 미국 문학계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는 글쓰기 행위가 기존의 작품을 읽고 그것을 다시 서술하는 것임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한편 철학사상을 작품의 주제로 삼으면서 보르헤스는 전통적 소설에서 가장 중시하던 인물의 행위를 부차적 차원으로 격하시킨다. 이런 기법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열린 작품’의 핵심을 제공했다. 특히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는 극단적 관념론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려는 지식인들의 노력을 보여주는 대표작인데, 여기서 보르헤스는 가치란 상대적인 것이며, 유일한 진리를 추구하는 문화는 거짓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보르헤스의 많은 작품들은 “만일 ∼라면”의 상상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것은 보르헤스의 작품의 핵심이 ‘허구’이며, 허구가 소설의 본질이라는 그의 생각과도 관련이 있다. 보르헤스는 이런 가정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진행시키고, 이런 가능성은 뜻하지 않은 환상적인 사건으로 변하면서 독자들의 흥미를 유발한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흥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우리가 진리라고 생각하는 사상이나 믿음에 대해 의문을 던지게 만든다. 이런 방식으로 보르헤스의 작품은 분해 되고 확산되면서 한두 개의 의미로 축소되지 않는다.

보르헤스의 작품에는 중심이 없다. 이 말은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의미를 찾으려고 애쓸 필요 없이, 독자가 자유롭게 자신의 관점에서 작품을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보르헤스의 작품은 철학이나 사회학, 혹은 건축학이나 수학, 또는 영화나 다른 예술적 관점으로 접근될 수 있는 것이다. 보르헤스를 읽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작품과 편하게 대화를 나누면서, 그의 작품을 독자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송병선(avionsu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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