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동관/햇볕정책은 불멸의 교리?

  • 입력 2002년 6월 30일 18시 29분


북한의 고(故) 김일성(金日成) 주석은 평생 단 한 번 ‘미 제국주의자’들에게 공식 사과를 했다. 76년 8월 18일 북한 병사들이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내에서 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경비하던 미군 장교 2명을 집단 살해한 ‘도끼 만행 사건’ 직후였다. 그는 인민군총사령관 자격으로 스틸웰 당시 유엔군사령관 앞으로 “이런 사태가 일어난 것을 유감으로 생각한다”는 사과 메시지를 보냈다.

사과 배경은 미국의 초(超)강경 대응이었다. 미 정부는 사건 직후 가지치기 작업을 바로 재개키로 결정하면서 ‘북한군이 무력 대응할 경우 황해도 연백평야까지 북한군을 몰아내 서울에 대한 위험 요인을 제거한다’는 전략까지 세웠다는 게 당시 관계자들의 증언이다.

시곗바늘을 요즘으로 돌려놓고 보자. 한국기업 관계자들이 중국 베이징(北京)에 경협 창구로 나와 있는 북측 인사들로부터 최근에도 ‘농반진반(弄半眞半)’으로 듣는 얘기가 ‘서울 인질론’이다. 언제든 서울을 공격할 수 있다는 것이 자신들의 최대 카드라는 암시다.

많은 국민은 벌써 잊었겠지만 올 들어 삭제 문제를 두고 논란을 벌였던 ‘주적(主敵)’개념이 국방백서에 명기된 것은 8년 전인 94년 남북협상 과정에서 북한 박영수 대표단장이 발언한 ‘서울 불바다론’이 계기였다.

필자도 98년 동아일보 방북단의 일원으로 평양을 방문했을 때 북측 관계자가 “남측 국군 따위는 한주먹 거리도 아니다”라며 겁주는(?) 얘기를 듣고 아연했던 적이 있다.

이런 사례들을 교직(交織)해 보면 29일 발생한 서해교전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와 교훈은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힘에는 힘’으로 대응하자는 원론적인 얘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원칙’에 대해서는 분명히 선을 긋고, 상황에 전략적으로 대응하는 사고를 갖지 않으면 똑같은 시행착오가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문제는 북을 대하는 우리 정부의 태도가 언제부턴가 ‘햇볕정책’이란 도그마에 매몰된 듯한 느낌을 안겨 준다는 점이다. ‘햇볕정책’이 됐든, ‘포용정책’이 됐든 그 자체는 목표가 아니라 북을 변화시키고 평화를 만들어내는 수단인 데도 마치 ‘불멸의 교리(敎理)’처럼 다루어지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이다.

올해 1월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이 나왔을 때만 해도 그랬다. 우리 정부의 대응에는 “미국의 태도가 강경한 만큼 너희도 양보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북한을 설득하며 상황을 활용하려는 자세보다 미국의 강경 태도를 누그러뜨리는 데 급급한 듯한 모습이 두드러졌다.

심지어 평화를 얘기하며 군축을 주장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원칙’인데도 이마저 미국의 무리한 압력인 듯, 몰아붙였던 것이 당시 청와대와 여권 주변의 분위기였다. 민주당의 한 대선 경선주자는 부시 대통령의 북한 재래식 무기 후방 배치 요구에 대해 “북한의 재래식 무기 후방 배치는 남한의 전력 재배치와 직결된다. 우리의 주권을 침해하는 행위다”라고 흥분하기도 했다.

작년 초 부시 공화당 행정부 출범 직후 미국 조야에 많은 지인을 갖고 있는 한 전직 고위관료는 “공화당 핵심 관계자들은 ‘우리는 50년간 소련을 상대해 공산주의를 붕괴시켰다. DJ 정부는 공산주의자들을 다루는 법을 모른다’고 생각한다”고 워싱턴 쪽 분위기를 전했다.

월드컵 폐막에 때맞춰 동족의 배에 일방적 포격을 가해 ‘세계의 축제’에 찬물을 끼얹은 북한의 행태를 보면서 미국 측이 “한국정부는 공산주의자들을 달래기만 하려는것 같다”는 의구심을 가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이동관 정치부 차장 dk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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