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일본]日열도 “TV앞으로”

  • 입력 2002년 6월 12일 17시 13분


일본 방송계에 ‘TV 전설’이라는 말이 있다. 40여년 전 프로레슬링을 중계하면 붐비던 공중목욕탕(센토)까지도 텅텅 비었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당시 일본은 경제대국으로 치닫고 있던 시절이었다. 인생을 몽땅 회사에 바쳤다고 해서 ‘회사인간’으로 불렸던 직장인들에게 특별한 오락거리가 있을리 없었다. TV 채널도 별로 없던 시절에 프로 레슬링 중계는 최고의 이벤트였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도쿄(東京)에서 시청할 수 있는 공중파 TV 채널만 7개가 되고, 각종 위성채널 등을 합치면 뭘 봐야 할지 모를 정도로 선택의 폭이 넓다. 아무리 인기있는 프로라고 해도 입맛이 까다로워진 시청자를 ‘독점’하기가 어렵게 된 것이다.

그런 일본에서 요즘 ‘새로운 TV 전설’이 탄생하고 있다. 바로 월드컵 중계방송이다. 공영방송인 NHK가 4일 중계한 일본과 벨기에 전은 전반전 시청률이 43.1%, 후반전은 58.8%나 됐다.

9일 후지TV가 중계한 일본과 러시아전은 이보다 더 높은 66.1%를 기록했다. 이는 축구 중계로서는 최고였던 98년 프랑스 월드컵 일본-크로아티아전의 60.9%를 깨면서 역대 종합 3위기록이다. 역대 종합 1위는 63년 NHK의 연말 가요홍백전(81.4%), 2위는 64년 도쿄 올림픽의 일본대 소련의 배구결승전(66.8%)이었다.

‘TV전설’의 부활로 도심에서는 평소 볼 수 없었던 ‘이변’이 일어나고 있다. 일본전이나 주요 경기가 있는 날은 콩나물 시루로 악명 높은 전철이나 지하철까지 텅텅 빈다. 술집이나 패밀리 레스토랑, 택시회사, 오락실 등의 손해가 막심하다. 24시간 편의점은 경기시작 1시간여전에는 음료수와 먹을 것을 미리 사려는 손님들로 붐비지만 경기 중에는 파리를 날린다.

반대로 배달을 해주는 피자집과 중국집은 일본 경기가 있는 날에는 매상이 두배로 늘어난다. 주부들도 TV를 보느라고 밥을 짓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수돗물의 사용은 경기시작전과 하프타임, 경기후에 급속히 늘어나는 ‘W’곡선을 그렸다.

일본의 월드컵 TV시청률이 높은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일본에서는 같은 경기를 여러방송이 동시 중계하지 않는다. 위성방송인 스카이 퍼펙 TV는 조별리그에서 결승전까지 64게임을 모두 중계하지만 공중파 방송은 이중 40개 게임만의 중계권을 샀다. 40개 게임중 NHK가 24개 게임을 중계하고 나머지는 다른 민방 등이 추첨을 통해 결정된 경기만을 중계한다. 일본전도 한 방송이 중계하고 있다. 10일 한국과 미국전은 중계대상에 포함되지 않아 아쉬움을 남겼다.

월드컵 열기가 예상 밖으로 뜨겁게 달아오르자 방송계에서는 스폰서가 붙지 않을 것 같다며 계약을 하지 않았던 나머지 게임의 방영권도 사뒀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도쿄〓심규선특파원 kssh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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