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눈]정옥자/'장안연우'를 그리며

  • 입력 2002년 3월 3일 18시 39분


몇 년 전 초겨울에 이사와서 동네를 한 바퀴 도는데 잎 떨군 활엽수들이 어린 아기의 정수리에 소복하게 난 머리카락을 빗질해 놓은 듯 가지런히 서 있는 야산 공원을 바라보는 순간 가슴이 뭉클했다. 산을 따라 단층으로 지어진 주택가의 고즈넉함도 좋았다. 봄이 되자 집집마다 몇 그루 정원수가 담장 밖으로 너울거리고 넝쿨장미가 피어 있는 광경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평화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는 행복감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지 그 집들의 창문이 뜯겨져 나가고 집안에 있던 온갖 잡동사니 세간들이 오장육부를 꺼내놓은 듯이 마당에 널려 있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불도저로 깔아뭉개지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멀쩡하던 집들이 하루아침에 부서져 나가는 것이 안타까웠고, 무엇보다 동네의 평화가 순식간에 사라진 것이 가슴아팠다.

▼정선의 산수화에 비친 서울▼

동네 입구에 ‘주거지역 12층 아파트 건설허가 결사반대’ ‘악덕업자 살찌우는…’ 운운의 플래카드가 걸리고 주민들이 단체행동에 들어갔지만 법에는 조금도 저촉되지 않기 때문에 머지않아 12층의 고급 아파트들이 들어설 전망이라고 했다. 결국 야산 공원은 아파트 전용의 정원이 되고, 부근 주민들은 일조권과 푸른 산을 바라볼 수 있는 녹시권(綠視權)을 동시에 잃어버리게 될 것임은 물론이다. 여름이면 고층아파트의 시멘트가 뿜어대는 열기에 고통받으며 산에서 스며들던 서늘한 야기(夜氣)를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지금 바로 내 집 앞에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야산공원을 병풍처럼 에워싸듯이 고급 고층아파트가 들어서게 되리라는 것이다. 한 집, 두 집, 빈집들이 눈에 띄더니 급기야 산 쪽 집들이 모두 이사가고 나자 밤낮 없이 집 무너뜨리는 소음공해, 먼지공해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 부산물을 실어내는 대형차 소리에 새벽잠을 깨곤 한다. 천재지변이나 전쟁 등 피치 못할 사정으로 생긴 것이 아니라 오직 업자의 돈벌이를 위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폐허, 아침마다 폐허로 변한 동네를 바라보는 심정은 참담할 뿐더러 그 한가운데서 사는 느낌은 고약하기 짝이 없다.

정지작업이 끝나면 곧 굴착작업이 시작되고 암반이라도 걸리면 머리가 흔들릴 만큼 기계음에 시달릴 것이다. 아파트가 들어서려면 2, 3년은 족히 걸릴 것이므로 그동안 공사로 인한 소음과 공사차량의 질주로 인한 위험부담으로부터 보호받을 장치가 과연 있는지 걱정이다. 아직 우리 사회는 환경보다는 개발지상주의 정서가 강하기 때문에 공사로 인한 소음규제 등의 법적 규제가 취약한 것으로 알고 있다.

국가는 하루속히 정밀한 환경법을 제정해 무분별한 개발로 인한 고통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 우선 개·보수가 가능한 지역의 아파트 개발을 제한하고 부득이한 경우라면 공사장에 주민들의 생활공간과 분리하는 높은 방음벽을 설치하도록 하고 휴일엔 공사를 중지하도록 해야 한다. 공사 시간을 일출 후 일몰까지로 한다든지 먼지 공해를 막기 위해 미리 물을 뿌리도록 하고 소음 규정을 정밀하게 하는 등 주민 생활권을 보장하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18세기 겸재 정선(謙齋 鄭敾)의 진경산수화를 보면 서울이 아름다운 공원도시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양의 경치를 그린 그림 중에서도 ‘장안연우(長安烟雨)’가 가장 생생하게 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천연의 자연 경관과 녹지를 그대로 살려 쾌적한 생활환경을 가꾸어 나가던 서울의 도시계획이 눈에 잡힐 듯하다. 아직 천연림이 남아 있던 그 시대에도 녹지보존을 위해 오늘날의 그린벨트 같은 금표(禁標)정책을 썼다. 숲이 인간의 삶에 얼마나 중요한 지를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숲은 사라지고 아파트만…▼

근대화 과정에서 서울이 산은 깎이고 개천은 복개되어 삭막한 도시로 변했음을 우리는 안타까워하면서도 새로 개발된 주택단지조차 보존하지 못하고 있다. 달동네나 낡은 건물들을 재개발하는 것은 당연하다. 오직 경제논리로 아늑한 주택가마저 밀어내고 아파트만 지어대는 현상이 문제다. 이러한 추세라면 머지않아 서울은 사방이 아파트 군으로 꽉 들어차 거대한 회색 시멘트덩어리로 둘러싸여 사람이 숨쉬고 살기조차 어렵게 될 것이다. 아파트의 수명이 30년이라 하는데 장차 아파트를 철거할 때 그 독성 강한 시멘트덩어리들을 어디다 처리하려는지 모르겠다.

선거철만 되면 그린벨트를 푸는 일도 자제해야겠고 사람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주택가가 마구잡이 개발로 황폐화되는 것도 막아야 한다. 도시는 인공의 산물이니 사람의 힘으로 얼마든지 아름답고 질서 있는 환경을 가꿀 수 있을 것이다.

정옥자(서울대교수·국사학·규장각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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