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칼럼]채수일/은행, 이젠 '소신경영' 펼칠때

  • 입력 2002년 3월 1일 17시 49분


프랑스 속담에 ‘비가 내린 후 햇살이 가장 밝다’는 말이 있다. 최근 4∼5년 동안 시련과 고통을 겪으며 변모해온 국내 금융산업에도 이 말이 적용된다. 가장 낙후된 업종 가운데 하나였던 한국의 금융기관, 특히 은행은 이제 상당한 경쟁력과 잠재력을 가진 업종으로 변했다.

외환위기 전후 금융권, 특히 은행권의 문제는 심각했다. 요즘은 당연시되는 리스크관리 체계, 고객 수익성 분석 시스템, 사업부제 및 책임경영제도, 그리고 교차판매와 같은 기본적인 역량에 대한 이해 및 준비 수준이 매우 낮았고, 거의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았다.

당시 한 시중은행 임원이 선진기법에 대한 주제 발표를 마친 필자에게 해준 충고를 잊을 수 없다. 그 임원은 다 맞는 말이지만 한국적인 문화와 여건에서는 절대로 도입될 수 없는 제도이니 괜히 고생하지 말라고 했다. 많은 은행 종사자들의 생각도 같았다. 그러나 당시 은행들의 상태는 심각해 일부 은행은 더 이상 생존이 어려운 지경이었다.

그리고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구조조정, 생존계획, 경쟁력 강화와 같은 목표 아래, 자의보다는 타의에 의해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이러한 과정은 국내 은행들에 너무나도 소중한 배움의 시간들이었다. 수익과 규모 간의 관점 전환이 무엇인지, 투자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전문가의 가치가 무엇인지 등에 대해 진정한 이해의 뿌리가 내려졌다.

그 결과 2001년 말 현재 국내 시중은행은 보다 안정된 산업이 되었다. 국내 어느 산업분야보다 두드러진 개선이었다. 주요 5개 은행의 외국투자가 지분이 50%가 넘을 정도로 국제적으로도 인정받는 투자처가 되었으며, 아시아권 은행들이 벤치마킹 목적으로 필자가 일하는 보스턴컨설팅그룹(BCG)에 국내 은행 소개를 자주 요청해올 정도로 입지가 명확해졌다.

은행 고객의 입장에서도 변화를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은행 객장 분위기가 달라졌고 직원들이 고객에게 보여주는 친절함도 달라졌다. 은행 문턱이 높다는 말은 옛말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물론 지속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도 많다. 일부 은행의 민영화, 기존 합병 은행들의 효율적인 내부 기능 통합, 비은행권과의 제휴, 추가적인 인수 및 합병, 주주를 위한 경영관리 등 더욱 중요하고 복잡한 사안들이 남아있다. 하지만 과거와 달리 금융권이 이런 과제들의 의미 및 우선순위를 명확하게 깨닫고 있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전망은 밝다.

이제는 은행들이 타의나 외적 환경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감을 가지고 소신 있는 경영을 할 때이다. 전환기에 요구되었던 다소 소극적이고 안정지향적인 사고의 틀을 부수고 주주가치 극대화에 실질적으로 도전하는 모습이 요구된다. 바로 그것이 시장이 원하는 것이다.

다른 금융기관들도 시중은행들의 경험을 참고삼아 이에 버금가는 개혁을 하지 않을 경우 반드시 고난의 시기가 온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19세기 프로이센의 장군이며 전쟁 철학자였던 클라우제비츠는 불안정기는 개혁의 엔진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국내 금융산업이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이 시점에, 클라우제비츠의 지혜를 발휘하여 향후 국가 경제에 기여하는 모습을 기대해 본다.

채수일(보스턴컨설팅그룹 서울사무소 지사장)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