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자유, 놓지못할 끈 '나 혼자만의 성경'

  • 입력 2002년 3월 1일 17시 31분


나 혼자만의 성경/가오싱젠 지음 박하정 옮김/전2권 각권 280쪽 8000원 현대문학북스

‘나 혼자만의 성경’은 ‘영혼의 산(靈山)으로 2000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가오싱젠(高行健)의 두 번째 장편소설이다. 작가는 존재 가능한 ‘다원적 기억’ 가운데 ‘개인적 기억’만을 이 소설속에 옮겨 놓았다고 말한다. 과연 무엇에 관련된 기억이기에, 중국 당국은 이 작품의 출판은커녕 수입조차 금지시켰을까.

소설은 문화대혁명을 반면교사 삼아 기억의 방식을 빌어 사람됨의 ‘존엄’과 ‘자유’에 대한 얘기를 소소한 얘기들 속에서 되살리고 있다. 중국 내에서도 1978년 덩샤오핑 체제 출범이래 문화혁명을 소재로 삼은 예술창작은 끊이질 않았다. 전혀 새로운 주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돋보이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다른 작품들이 뜨거운 혁명의 ‘대설(大說)’을 그 중심에서 분해하거나 전복하고자한 ‘후일담’들인데 반하여, 이 소설은 작가 자신이 ‘개인’의 영역을 냉정한 기억으로 재구성하면서 문혁의 진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 책은 역자의 꼼꼼한 번역에 힘입어 소소한 일들에 스며든 사람의 섬세한 감정까지 우리말로 되살려내고 있다.

소설은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시점(1997)에서 시작한다. 기억은 주인공 ‘그’가 유태계 독일 여성을 만나 중국 대륙 내에서 거주하던 시절에 관한 회고로 출발, 곧바로 중국 대륙이 공산화되기 이전인 1949년 이전의 어린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다시 갖가지 정치적 동란, 문화혁명으로 이어지다, 바야흐로 해외로 ‘도망’한 후 서양의 이곳 저곳을 떠도는 유랑 인생을 작가는 잠언과 같은 문체로 그려내고 있다.

이런 내용은 작가 자신이 걸어온 처지를 연상시키는데, ‘도망’의 가장 큰 원인은 문화혁명이라는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유린당한 ‘강간당한 개인’에 대한 자각에서 비롯된다. 이런 자의식은 소설의 곳곳에 노골적으로 묘사된 그의 애인들의 소녀시절에 대한 기록과 겹친다. 즉 육체적 강간을 당한 이후 정신적 고통 속에서 성적으로 타락해 가는 여인들의 모습으로 변주되는 것이다.

가오싱젠은 드라마 작가답게 ‘언어의 흐름’이라는 독특한 문체에 기대어 섹스를 포함한 인간의 모든 언행에 대하여 완급, 깊이를 능숙하게 조절하며 억압, 왜곡되어 가는 인간의 본성을 차가운 시선으로 추적하고 있다.

특히 전체 61장을 통틀어 계속 언급되며 서사를 이끄는 화두는 ‘자유’다. 그것은 작품의 후반부에 ‘존엄’ 내지 ‘존엄성’이라는 말로 수렴된다. 다소 노골적이긴 하지만, 53장의 다음 장문의 진술은 작가정신을 그대로 집약하고 있다고 봐도 좋다.

‘한 사람을 죽일 수는 있다. 그러나 (…)사람이 초개만은 못하지만…인간이란 목숨 이외에도 존엄이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으로서의 그 자그마한 존엄성마저도 유지할 수 없다면 그리하여 피살당하거나 자살하지 않는 한 그래도 살아남고자 한다면 탈출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존엄성은 존재에 대한 의식이며 이것은 곧 나약한 인간을 버틸 수 있게 만드는 힘이다. 그러므로 존재에 대한 의식이 사라지면 그 인간은 사망한 것이나 다름없어진다.’

위의 진술은 마오쩌뚱에 대한 증오를 내포한다. 바로 앞에 묘사된 마오쩌뚱 기념관에 대한 기억은 그 증거다.

그러나 우리는 유의해야 한다. 덩샤오핑 통치시기에 완공된 마오 기념관에는 마오의 후계자 화궈펑이 쓴 제자(題字)가 그대로 내걸렸다는 점이다. 덩샤오핑은 이 기념관을 자신이 주도하지 않았다고 짐짓 떠넘기면서 동시에 이 기념관을 통치에 이용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그런데 이런 중국인 특유의 ‘수사학’ 또는 태도는 덩샤오핑만의 것이 아니다. 작가는 이 점을 의식적으로 망각하고 싶었던 것일까.

‘일 개인으로 하여금 당신(마오쩌뚱)의 말을 하도록 강요할 수는 없다.’ 그러나 중국 내에는 13억의 ‘일 개인’이 살아가고 있으며, 그 속에는 문혁을 외면적으로 긍정하면서 내면적으로 부정하거나, 내면적으로 긍정하면서 외면적으로 부정하는 사람들이 상당수다. 이런 현실을 똑바로 보는 점이야말로 중요한 것이다.

이 작품에 대한 세계 문단의 호평은 서양의 ‘중국혁명 읽기’ 전통에 닿아 있다는 사실에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중국의 20세기가 혁명적 변화의 연속적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면, 서구의 독자들이 20세기 중국을 문학 텍스트로 읽어 온 맥락은 어쩐지 중국의 ‘혁명’에 대한 이해 각도에 상응한다는 인상이 짙다.

노벨상 수상으로 유명한 펄벅의 ‘대지’(1931)와 앙드레 말로의 ‘정복자’(1928), 콩쿠르상 수상작 ‘인간조건’(1931)은 그러한 독서의 커다란 두 갈래인데, 전자가 미국적 자유주의의 시각에서 중국의 혁명을 읽은 경우라면, 후자는 유럽적 진보주의 시각에서 그것을 이해한 경우다.

‘나 혼자만의 성경’에 대한 찬사는 ‘영혼의 산’에 대한 그것과 더불어 바로 이러한 전통을 이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요컨대 사람들은 중국의 ‘혁명 이후’에 대해 듣고 싶어했던 것이다.

신정호 전남대 강사·중국현대문학

▼저자 가오싱젠은…

가오싱젠(1940∼)은 중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소설가이자 극작가겸 화가. 중국 장시성에서 태어나 베이징외국어대에서 불문학을 전공한 후 번역가로 일했다.

1979년 문학잡지에 시론과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했지만 실험적 성격이 강한 그의 작품은 공격의 대상이 되어 정치적으로도 요시찰 인물이 되었다.

베이징을 떠나 양쯔강을 따라 여행하면서 첫 장편 ‘영혼의 산(靈山)’을 집필하기 시작한 그는 89년 프랑스로 망명한 뒤 비로소 활발한 저술 활동을 시작해 1990년 대만에서 ‘영혼의 산’을 출간했으며 1995년 프랑스어 번역본이 나온 뒤 호평을 받았다. 이 작품은 그에게 2000년 뉴밀레니엄의 첫 노벨문학상을 안겨주었다.

1992년 프랑스 문예훈장을, 2001년 프랑스 최고 영예인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우리나라에서는 2001년 7월 ‘영혼의 산’이 번역 출간됐다.

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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