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추적]모성보호 법따로 현실따로…출산휴가 내자 노골적 사표압력

  • 입력 2002년 2월 27일 18시 12분


기업체 여직원 박모씨(32)는 지난해 말 출산휴가를 냈다가 황당한 일을 당했다. 회사가 “3개월분 월급을 줄 테니 사표를 쓰라”고 종용했기 때문이다.

만삭의 몸상태마저 못마땅하게 여기는 듯한 회사의 노골적인 압박에 결국 박씨는 회사를 나오고 말았다.

여성들이 직장에서 겪는 차별적인 관행이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는 명백한 현행법 위반이지만 대부분 눈에 보이지 않는 압력이나 분위기 조성 등의 방법으로 이뤄지고 있어 대응하기가 쉽지 않다. 남성 위주의 보수적 판결기준이 문제 해결을 가로막는 걸림돌이라는 지적도 많다.

▽아직도 계속되는 회사 내 성차별〓회사 내 성차별은 87년 남녀고용평등법이 제정되면서 외형적으로는 거의 사라진 상태. 그러나 아직도 여성단체에는 피해를 호소하는 여성들의 전화가 끊이질 않는다. 여성민우회의 경우 한달에 최고 10건의 피해 사례가 접수되기도 한다. 이는 98년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이후 더 늘어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중소기업의 사장 여비서인 김모씨(28)는 ‘결혼하면 계약직으로 바꾼다’는 회사 규약 때문에 결혼을 망설이고 있다. 사장 여비서로 일해온 20대 후반의 이모씨는 임신한 뒤 회사가 후임 여직원을 채용하는 바람에 대기발령 상태로 밀려났다.

▽법과 현실의 괴리〓근로기준법과 남녀고용평등법은 사업주가 근로자에게 성별 혼인 임신 출산 등의 이유로 근로조건을 달리하거나 불이익을 주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어길 경우에는 최고 5년 이하의 징역이나 3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규정해 놓았다.

그러나 최근에는 성차별이 교묘한 간접차별의 형태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회사측이 관행이나 경영상 불가피한 상황임을 내세우며 반발을 억누르기도 한다. IMF 관리체제 당시 사내 부부 중 대부분 여성들의 사표를 받은 농협이나 알리안츠제일생명은 대표적인 경우.

남편에게 인사상 불이익을 주겠다는 회사측의 압력에 여성 680여명이 한꺼번에 사표를 냈던 농협 사건은 “자발적인 퇴직으로 보인다”는 이유로 여성들이 1심에서 패소했다. 법원은 승소판결을 내리면 이미 해고된 수백명의 여성을 복직시켜야 한다는 ‘상황적 부담’도 고려한 것으로 알려졌다.

법원은 창사 이후 기혼 여직원이 1명도 없는 사례가 문제된 ‘대한제분 사건’에서도 지난해 말 회사측의 손을 들어줬다.

이유정(李E靜) 변호사는 “법원이 남성 위주였던 과거의 보수적 판례를 답습하는 경우가 많다”고 꼬집었다. 그는 성차별 금지 관련 법규들이 너무 포괄적이거나 추상적이어서 실효성이 없다는 점도 지적했다.

▽가치관과 인식의 변화 선행돼야〓사내 부부 중 여성직원에게 사표를 종용한 행위를 부당해고로 인정한 서울고법의 26일 판결은 이런 상황에 대해 진일보한 판례로 평가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은근한’ 압력도 성차별 요소에 해당한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여성들의 복직과 이후 회사 내 적응문제 등은 여전히 문제로 남는다. 출산휴가가 90일까지로 늘어나면서 여성 고용을 더 부담스러워하는 일부 분위기도 해결해야 될 과제. 황덕남(黃德南) 변호사는 “구체적인 법적 기준 마련과 함께 여성인력의 특수성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사회 인식의 변화가 병행돼야 한다”며 “여성들도 사회생활에서 제 몫을 해낼 수 있도록 책임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정은기자 light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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