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경아의 책사람세상]선악 가르는 이분법적 사고 위험

  • 입력 2002년 2월 15일 17시 41분


미국 부시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의 파장은 가라앉을 줄 모르는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은 한반도의 긴장 고조를 걱정하고, 다른 사람들은 무기 판매 전략이려니 하고 추측하기도 한다.

그러나 과연 ‘악’이 무엇인지, ‘악’이 어떤 맥락에서 탄생했고 발전했는지 제대로 알고 그런 말을 한 것인지,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그런 말을 한 것인지도 궁금하다.

성경에 나오는 사탄을 제외한다면 문학 작품에서 가장 유명한 악마는 역시 밀튼의 ‘실락원’(중앙출판사, 1995)에 나오는 악마와 괴테의 ‘파우스트’(민음사, 1999)에 나오는 메피스토펠레스일 것이다. 그런데 ‘실락원’의 악마가 빛나는 영광의 천사에서 악마로 전락한 까닭은 바로 ‘오만’이라는 죄과이다. 과연 미국은 스스로 선과 악을 심판하는 심판자의 역할을 떠맡는 오만에서 자유로운가?

또 메피스토펠레스는 실체를 가진, 때려부숴야 할 악이라기보다 인간의 약한 점을 파고들어 유혹하는 악마이다. 이탈리아 출신의 비교문학자 프랑코 모레티는 ‘근대의 서사시’(새물결, 2001)에서 메피스토펠레스가 갖는 역할을 분석하면서, 서구의 근대는 ‘악’이라는 것을 만들어 자신의 죄과를 전가시키고 자신은 어쩔 수 없이 유혹에 넘어간 체함으로써 결백하다고 주장했다는 통렬한 고발을 한다. 미국 또한 타국을 ‘악’으로 명명함으로써 스스로는 결백하고 무고한 희생자 역할을 하려는 유혹에 빠져있는 것은 아닌지 경계할 일이다.

서구의 악과 악마 개념을 흥미롭게 기술한 ‘악마의 문화사’(제프리 버튼 러셀, 황금가지, 1999)에는 마치 지금의 사태를 내다본 것 같은 말이 씌어져 있기도 하다. “악은 전 우주적 차원으로까지 확장될 수 있다. 현재 적으로 규정한 국가나 집단에 맞서기 위해서라면 온 세상을 파괴해버리겠다는 위협도 서슴지 않는 인간의 모습은 악마 그 자체, 즉 할 수 있는 데까지 우주를 파괴하고 멸망시키려고 의도적으로 획책하는 마왕의 의지를 반영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쯤 되면, 어느 쪽이 ‘악의 축’인지 헷갈릴 지경이 아닌가.

국제 정치에서 ‘선악’의 이분법을 꺼내드는 것은 이토록 위험하다. 선과 악이라는 모호하면서도 강력한 분류법은 꼭 상대에게만 머물러 있으라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전 세계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는 대량살상 무기 문제가 해결되고 국가간의 대결이 하루빨리 사라지기를 바랄 뿐이다.

소설가 supermew@hitel.net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