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황호택]네포티즘이 어질러놓은 게이트

  • 입력 2002년 2월 4일 18시 24분


전두환 전 대통령 시대에 허(許)씨 성을 가진 세 사람이 우연히 힘 쓰는 자리에서 함께 있어 시중에서는 ‘스리 허’라는 말이 유행했다. 그러나 스리 허 가운데 허문도씨를 제외하고 다른 두 허씨는 얼마 안가 청와대에서 밀려나 영영 대통령 곁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언론이 자유롭지 못하던 시절이라 권력의 장막 뒤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제대로 조명을 받지는 못했지만 두 허씨가 권력의 내부 동심원에서 튕겨나간 것은 이철희 장영자 사건에 관련된 대통령의 친인척에 대해 강력한 사법처리를 주장했기 때문이라는 후문이 나돌았다. 천문학적인 어음 사기극을 벌인 장영자 여인의 형부가 바로 대통령의 처삼촌이었다.

▼DJ '친인척'에 관대▼

빈한한 농촌 출신의 전 전 대통령은 군에서 성장하는 과정에서 처가 신세를 많이 졌다고 스스로 술회한 바 있다. 장인과 처삼촌이 모두 군문에서 장군을 지냈다. 이장(李張) 사건의 태풍이 휩쓸고 지나가자 두 허씨에게 당했다고 생각한 별들의 가문에서 서서히 두 허씨를 고사시켰다는 비화가 한참 뒤 흘러나왔다. 신임이 두터운 측근이라도 최고 권력자의 자녀와 친인척에 대해 직언을 하는 것은 이처럼 정치 생명을 걸어야 하는 모험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가족과 친인척들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특별할 것이다. 71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과 대결한 뒤 유신체제 7년 동안은 수난의 계절이었다. 80년에는 장남 김홍일 의원이 아버지와 함께 신군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복역을 했다. 친인척들도 오랜 세월 유형무형의 탄압을 겪으며 야당 정치인 김대중씨의 가슴을 아프게 했을 것이다. 이런 김 대통령 앞에서 감히 자녀와 친인척에 관해 직언을 할 수 있는 참모는 많지 않으리라고 짐작된다.

‘자녀와 친인척 봐주기’라는 뜻을 지닌 네포티즘(nepotism)은 선진 민주국가에서 부패와 거의 동의어로 취급된다. 김 대통령은 97년 대통령 후보 시절 대통령 친인척 부당행위 금지법을 만들겠다고 공언했지만 이 약속도 지켜지지 않았고 서구적 기준에서 보면 네포티즘에 관해 엄격하지 않은 편이었다.

장남 김홍일 의원의 장인은 광복회장이고 처남은 언론사 사장이다. 대통령의 동서인 노령의 건강보험심사평가원장이 뒤늦게나마 물러난 것은 잘한 일이다. 신병치료차 미국에 간 김 의원은 툭하면 몸통 의혹으로 거론된다. 대통령의 2남인 김홍업 아태재단 부이사장도 몇몇 게이트에서 해명하는 소동이 빚어졌다. 물론 사실과 관계없는 부풀리기나 뜬소문도 없지 않겠지만 아버지로서도 마음을 놓지 못할 것이다.

독일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의 동생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7개월 동안 실업수당으로 생활하다가 최근 스페인 휴양지 관광 잠수선의 안내원 자리를 얻었다. 형인 총리의 도움을 구해보라는 주위의 권유에 “나는 370여만 독일 실업자의 한 사람에 불과할 뿐”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형도 동생을 챙기지 않았다.

집안에서 큰 인물이 나와 친인척들이 덕을 보는 것을 사회악이라기보다는 미풍양속에 가깝게 보는 인식이 우리 사회의 저변에 아직 남아 있다. 우리 사회 같았으면 놀고 있는 총리 동생을 실업수당이나 타먹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검찰총장의 동생만 돼도 국세청장과 검찰 간부들을 만나고 다니고 대통령 처조카는 대통령경제수석, 국정원 차장, 해군참모총장을 움직일 수 있다.

공직을 지니지 않은 단순한 처조카였으면 이렇게까지 국가권력기관을 휘젓고 다니지는 못했을 것이다. 대통령의 처조카를 100조원의 공적자금을 관리하는 예금보험공사의 2인자 자리로 보낸 네포티즘이 오늘의 사태를 불렀다는 판단이다.

▼지금부터라도 통제를▼

나무가 쉬고자 해도 바람이 멈추지 않듯 대통령의 친인척 주변에는 힘을 빌려 어떻게 해보려는 브로커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들게 마련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퇴임 후 형 동생 동서 처남이 구속됨으로써 네포티즘의 대가를 맵게 치렀다. 국내외의 권력자들이 재직 중 어질러진 네포티즘 때문에 퇴임 후 처절하게 당했다는 사실(史實)을 상기하면 다소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김 대통령이 친인척 문제에 관한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장기 집권한 수하르토 전 대통령의 네포티즘에 시달린 인도네시아에서는 작년 7월 메가와티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가까운 친인척을 불러 결탁하거나 부패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는 모임을 가졌다. 그녀는 친인척 모임에서 “봉건사회의 네포티즘은 심각한 잘못이라고 볼 수 없었지만 민주 사회에서는 아주 큰 문제”라고 주의를 주었다.

황호택 ht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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