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그는 전범이었다 '히로히토-신화의 뒤편'

  • 입력 2002년 2월 1일 17시 17분


히로히토-신화의 뒤편/에드워드 베르 지음 유경찬 옮김/557쪽 1만7000원 을유문화사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불에 그을린 채 일생을 마감했다. 1차대전 당시 독일 오스트리아의 패전군주들도 국외로 쫓겨나 비참하게 생을 마쳤다.

2차대전 당시 일본의 최고 군통수권자는?

“일본에서 천황이 모르는 것은 없다. 천황이 시키지 않은 일을 한 사람도 없다.”

A급 전범 도조 히데키는 법정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그러나 천황 히로히토는 갇히지 않았다. 퇴위하지도 않으며 천수를 누렸다. 바다생물과 곤충을 탐구하는 생물학자로서 평화로운 군주의 모습을 과시하면서.

어떻게 그럴 수가? ‘평화를 사랑했던 그는 전쟁이 결정된 어전회의에서 조부 메이지 천황의 시를 인용하면서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개전 결정에 저항했으나, 위압적인 군국주의자들에 의해 전쟁을 용인할 수밖에 없었다….’라는 ‘천황 무책임론’이 여론의 대세였던 것이다.

태평양 전쟁 당시의 히로히토

일본의 죄과에 눈감을 수 없는 한국인들로서는 의아하기까지 한 일이지만, 1989년 이 책이 등장할 때 까지도 ‘천황 무책임론’을 반박한 영어 원서로는 베르가미니의 ‘일본 제국주의의 음모’ 가 유일했다.

저널리스트이자 영화 ‘마지막 황제’의 원작자인 저자는 영화적 상상력이 아닌 저널리즘적 엄밀함으로 ‘전범 히로히토’의 진실을 들추어낸다. 주된 자료는 히로히토의 최측근이었던 옥새관(玉璽官) 기도 고이치의 일기에서 입수된 것. 육군 참모총장 스기야마의 전시회의 기록도 사실(史實)의 재구에 한 몫을 한다.

과연 알려진대로 히로히토가 호전적인 군인들에 제동을 걸었나? 측근의 관찰로 볼 때, 군 최고통수권자로서 그의 태도는 ‘학생에게 목표와 전술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교사’와 같았다. 신중한 자세와 역사적 관례를 거론하면서 열혈 군인들을 통제한 그의 태도는 훗날 ‘언제나 평화를 갈망하고 호전적 태도를 꾸짖은’ 것으로 미화되었다는 분석이다.

일본 경제부흥기인 말년의 히로히토

군부의 조종을 받은 꼭두각시였다는 해석도 ‘진실과 거리가 멀다.’ 저자는 그가 육군과 해군을 격리시키고, 군과 정부를 격리시켜 상호 견제토록 함으로써 자기 공간을 최대한 확보하는데 대단한 재능을 보였다고 분석한다. 전쟁 결정의 순간에 그가 읊었다는 시(사해에 흩어져 있는 우리 모두는 형제인데/바람과 물결은 왜 이리도 거센가) 역시, 평화를 희구하는 내용이 아니라 주변세계가 순조롭게 일본에 복속하지 않아 개전할 수밖에 없다는 심경을 표현했다고 밝힌다.

이 책은 다소의 아쉬움도 남긴다. 히로히토와 관련된 최측근의 기록을 인용해 생동감을 높인 반면, 전후 천황제 생존의 발판을 마련해주는 맥아더 트루먼 등 미국 군 정계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추측’을 넘어서는 심층적 분석과 증언을 담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의 발간과 히로히토의 사망은 그에 대한 미공개 자료가 다수 햇빛을 보게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최신의 관련 연구성과를 담은 허버트 빅스의 ‘히로히토와 근대일본의 형성’은 2000년 퓰리처상 논픽션부문을 수상했으며, 한국어로 번역작업이 진행 중이다.

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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