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경아의 책 사람 세상]악다구니 교육전쟁 벗어나는 길은

  • 입력 2002년 1월 25일 17시 18분


서울 강남으로 사람들이 한없이 몰리고, 강남 열풍의 근원이 교육이라는 것은 씁쓸한 일이다.

좋은 학교와 좋은 학원을 찾아 서울 남쪽으로 모질게 부는 이 뜨거운 바람 앞에서, “자기의 삶을 스스로 파악하고 사랑과 일의 보람을 아는 인간”을 만드는 교육, “모든 사람이 주어진 자질에 따라서 스스로 깨우치며 세상과 지적 교섭을 가질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교육(김우창, ‘김우창 전집 5 : 이성적 사회를 향하여’· 민음사·1993)의 이념은 가볍게 허공으로 날아가 버린다.

“사회 발전의 어느 단계에 이르면, 이 실패는 그 사회에 커다란 장애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라는 경고도 하릴없다. 가르치고 배우는 일은 즐거움이 아니라 어떤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서로 생산량을 겨루고 달성해야 하는 노역이 되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구별짓기 :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새물결·1995)에서 지적한 대로, 이제 학교란 ‘학력 자본’을 통해 부모의 경제적·사회적 자본을 자식에게 물려주는 기관이 된 것이다. 자식에게 교육을 하는 것은 “경제 자본의 학력 자본으로의 전환”이며, 시쳇말로 말하자면 ‘투자’이다. 이런 악다구니 경쟁으로 부모가 자식에게 만들어 주고자 하는 재산과 사회적 지위는, 역설적으로 이 경쟁 때문에 점점 멀어져 간다.

“학력 자격과 그것을 부여하는 학교 제도는 계급간 경쟁의 핵심적 쟁점 중 하나가 되고, 이러한 경쟁은 교육 수요의 전반적이고 계속적인 증대와 학력 자격의 인플레이션을 야기하게 된다.”

정말로, 이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생각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부모와 자식이 서로 간섭할 수 없는 자율적인 타인이라는 개인주의가 퍼져가는 것이다. 자식이 부모의 삶과 재산과 지위의 연장이라는 전통적인 관계를 벗어나, 사회와 자기 자신에 대해 각자 동등한 책임을 지는 인격체라는 새로운 관계로 접어드는 것이다. 놀랍게도, 이러한 인식은 이미 1927년의 소설에 나타난다.

조명희의 ‘낙동강’ (동아출판사·1995)의 여주인공 로사는 ‘우리가 너 공부시키느라고 얼마나 애를 먹었는데 배은망덕을 하느냐’는 부모의 닥달에 이렇게 대답한다. “그러면, 어매 아배는 날 사람 노릇 시킬라꼬 공부시킨 것이 아니라, 돼지 키워서 이(利)보드끼 날 무슨 덕 볼라꼬 키워 논 물건으로 알았는게오?”

송경아 소설가 supermew@hite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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