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유전자 감식 "범죄율 제로에 도전"

  • 입력 2002년 1월 20일 17시 24분


경기도 경찰에는 최근 1년여 동안 한 남자가 고양 일산 안양 용인 인천 등을 돌아다니며 11명의 부녀자를 잇달아 성폭행했다는 신고가 들어왔다. 피해 여성들의 몸에서 정액을 채취해 DNA 지문을 분석한 결과 모두 한 사람이 성폭행을 한 것으로 드러났지만, 범인은 오리무중.

30대 후반의 이 남자는 지난해 9월 경기도 고양시에서 마지막으로 성폭행을 즐기다 꼬리를 잡혔고, 정액에 대한 국립과학수사연구소(국과수)의 유전자감식 결과 11건의 DNA 지문이 일치했다. 이 남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 이 DNA 지문을 가질 확률은 400억분의 1. 결국 이 남성은 앞서 저지른 성폭행을 모두 시인하고 철창에 갇혔다.

DNA 지문이 강력사건의 해결사로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국과수가 지난해 유전자 감식기법으로 분석한 정액, 타액, 체모, 핏자국, 뼛조각은 모두 1만1551점. 5년 전보다 4배 가까이 늘었다.

유전자감식기술은 발전을 거듭해 요즘은 100만 분의 1㎎의 샘플로도 범인을 식별한다. 정액이 묻은 르윈스키의 드레스에서 클린턴의 DNA를 찾아내는 것은 식은 죽 먹기이고, 담배꽁초에 묻은 침, 가방의 손잡이에서도 DNA 지문을 채취할 정도이다.

97년 만 하더라도 광주고등법원은 한 강간 혐의자의 DNA 감정서에 대해 증거능력 부족으로 무죄를 선고한 일이 있었다. 이 혐의자와 똑같은 유전자형을 가진 사람이 한국인 9만 명 당 한 명이 존재한다는 정도로는 증거력이 약하다는 이유였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 한면수 유전자분석실장은 “요즘에는 100억분의 1 이상의 정확도로 개인을 식별할 수 있어 증거력에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한 실장을 포함해 26명의 유전자분석실 직원들은 요즘 큰 고민거리가 있다. 하루 30건이 넘는 샘플을 분석해 3만 건에 이르는 과거의 DNA 지문과 대조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다.

대조를 쉽게 하려면 ‘유전정보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어야 하지만 법적 근거가 없어 구축을 못하고 있다. 90년대 중반 이미 유전정보 데이터베이스 관련 법률 시안은 나왔지만, 인권침해 시비, 경찰과 검찰간의 주도권 다툼이 해소되지 않아 법무부가 법률의 제정을 미루고 있다.

경찰청 산하 국과수와 라이벌 관계인 대검찰청 유전자감식실은 규모는 작지만 유전자감식기법을 독자 개발했고, 벤처기업인 ㈜아이디진에 특허실시권을 넘겨 감식 키트를 개발 중이다. ㈜아이디진은 한달 전부터 서울 시내 지하철에 ‘유전자가 범죄 없는 세상을 만든다’는 광고를 붙이고 분위기 조성에 앞장서고 있다.

서울대 법의학교실 이숭덕 교수(DNA지문연구회 회장)는 “DNA 지문이 범죄 예방 효과를발휘하려면 유전정보를 빨리 데이터베이스화해 효과적인 검색을 가능케 해야 한다”며 “경찰과 검찰의 주도권 다툼을 해소하기 위해 제3의 독립기관으로 만드는 방안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밖에 유전자감식에 대한 정도관리체제가 갖추어지지 않은 데다, 검찰과 국과수가 서로 다른 검사법을 사용하는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아이디진이 최근 실수로 시료를 바꿔 친자감별을 하는 바람에 가정을 파탄 지경에 빠뜨린 것은 대표적 사례이다.

참여연대 시민과학센터 한재각 간사는 “선의의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외부기관이 유전자감식기관의 분석능력을 수시로 테스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유전정보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앞서 유전정보와 샘플이 유출되거나 오용되지 않도록 유전정보보호법을 먼저 제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간, 살인, 강도 등 재범율이 높은 강력범에 대해 유전정보 데이터베이스를 만드는 것은 국제적인 추세다. 1995년 처음 데이터베이스를 만든 영국을 비롯해 미국 독일 네덜란드 스웨덴 등이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했다.

신동호 동아사이언스기자 dong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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