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최장집/‘정치 리더십’이 문제다

  • 입력 2002년 1월 2일 18시 18분


한국의 민주주의는 중병을 앓고 있다. 여야당의 정치는 이전투구의 장으로 변한 지 오래고, 최근 하루가 멀다 하고 터져 나오는 비리사건들은 정치권에, 넓게는 우리 사회에 부정부패가 얼마나 만연되어 있는가를 드러내고 있다. 여전히 실세다 무어다 하는 보이지 않는 힘이 정부의 주요 정책과 인사 결정에서 공식적이고 투명한 민주적 절차를 압도하고 있다. 그 와중에서 정부의 국정운영 능력, 리더십은 약해질 대로 약해져 실종된 것처럼 보인다.

민주화 10년의 경험에서 우리는 김영삼 김대중 두 민간정부의 임기 마지막 해가 너무나 닮아 가는 모습에 놀라게 된다.

지금 한국의 민주주의는 어디에 와 있고,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우리는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잘 안 되는 원인은 여러 차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한편에서는 서구와는 달리 시민사회 내지는 시민적 문화의 토양이 약하기 때문에, 또는 공공성의 정신이 약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국가의 관료주의가 너무 강하기 때문에, 분단상황으로 이데올로기가 너무 경직돼 있기 때문에, 또는 정치를 경제논리에 종속시키는 세계화 담론의 힘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런 얘기들이 모두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이유들 가운데 ‘좋은 정치의 부재’가 민주주의의 위기를 가져오고 있다는 사실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혼란과 불신을 일으키는 문제의 핵심은 좋은 정치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조건이 아닌가 한다.

정치는 여러 부분으로 구성된 사회에 있어 그 전체적 운영을 주도하는 힘이다. 현실의 여러 제약 속에서도 대안을 찾아내고, 그 가능성을 진작시키는 힘을 조직화하며, 사람들에게 미래에는 행복해질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것이 정치의 역할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정치를 ‘가능의 예술’이라고 부른다. 무엇이 이를 가능케 하는가. 그것은 바로 정치적 리더십이다. 르네상스 시기 근대 정치학을 열었던 마키아벨리 이론의 핵심은 공화주의와 같이 좋은 제도를 가졌다 하더라도 리더십 없이는 그것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좋은 민주주의는 좋은 정치 없이는 불가능하고 좋은 정치는 좋은 리더십 없이는 실현되기 어려운 것이다.

대통령 선거를 향한 경쟁은 사실상 시작되었다. 여야당의 후보 주자 모두 자신이 대통령이 되겠다고 하는 소리는 높다. 그러나 내가 어떤 정치를 하겠다고 한국 민주주의의 대안을 제시하는 사람, 내가 어떤 비전과 프로그램을 가지고 좋은 정치를 만들 수 있기 때문에 미래에 희망을 줄 수 있다고 믿게 하는 사람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한 리더십의 형성은 어떻게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집합적 의지를 집약하고 대변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세계화에 대한 대응, 한반도 탈냉전과 평화질서의 구축문제, 사회복지정책, 정당민주화와 관료기구의 개혁 등 한국 사회의 발전 방향을 위해 생각해야 할 문제는 많다. 이러한 주요 정책사안들은 우리 사회의 갈등과 차이에 토대를 두고 그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라고 할 때, 그 대안들은 위로부터의 엘리트 중심적 의지와 밑으로부터의 민중적 의지 사이에서 정당들에 의해 조직되고 경쟁하는 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서는 시민사회와 시민적 정치문화의 강화가 필수적인 요건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좋은 사회를 지향하는 가치와 의지, 그리고 그 정신적 토양이 스스로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장기적 전망과 함께 미래에 희망을 줄 수 있는 리더십과 정치는, 남보다 잘 살기 위한 경쟁과 투쟁이 지배하는 사회로부터 좋은 사회를 향한 변화, 즉 한국사회 전체의 변화를 가능케 하는 시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대통령선거 과정 자체가 사람들의 관계를 많이 엮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규합하는가 하는 ‘수의 경쟁’에서 벗어나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는 비전과 잠재력을 보여주는 경쟁으로 변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새해에는 이러한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좋은 정치가 실현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최장집(고려대 교수·정치학·아세아문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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