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B/여성이 경쟁력이다]취업서 제외…승진서 낙오…

  • 입력 2002년 1월 2일 18시 10분


영국의 여류작가 버지니아 울프가 “여성이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500파운드의 돈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말한 건 20세기 초였다. 거의 한세기가 지난 오늘날은 어떤가. 한국에서 여성이 경제적 사회적 주체로 살아가려면 이보다 더 많은 것이 필요하다.

한국사회에서 여성이 당당하게 일한다는 것은 온갖 장애물과의 싸움을 뜻한다. 이들 장벽은 우리 사회의 총체적 ‘합작품’이다. 여성인력을 활용하려면 결국 이들 장벽을 없애야 하는 셈이다.

▽출발선부터 불평등〓‘여성은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진다’고 한다.

대학교육을 통해 ‘여성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들여다보자. 세계 최고 수준인 한국의 교육열은 여성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여자가 배워 뭐하나’는 식의 남존여비는 교육에 관한 한 이제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교육의 내용이 무엇이냐가 문제다. 2000년에 4년제 대학에 들어간 남녀 학생의 비율은 거의 차이가 없다. 여성은 학령인구 전체의 44.0%가 대학에 입학해 남성(47.4%)과 거의 비슷한 수준이다. 졸업률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취업률은 왜 큰 격차가 날까. 아직도 남아 있는 남녀차별적 고용행태를 논외로 친다면 해답의 한가지는 학과 선택의 차이에서 찾을 수 있다.

▼글 싣는 순서▼

- <上>한국경제 '절반의 자원'이 버려져있다
- <中>취업서 제외…승진서 낙오…
- <下>사회진출 발목잡는 보육정책

진학률은 비슷하지만 취업에 유리한 학과 선택률은 전혀 딴판이다. 즉 산업 현장에서 많이 필요한 분야인 경영 공학 계열의 남녀 비율은 85 대 15로 격차가 크다(교육인적자원부, 2000년).

대학 진학 때부터 불리한 출발선에 선 것이다. 이것이 여성인력 활용의 1차 장애물이다.

이 같은 불균형은 여학생들의 진학 목적이 취업보다는 ‘소질 계발’ ‘인격과 교양 수양’을 많이 꼽고 있는데서 비롯된다. 그렇다 보니 하향취업을 위해 전문대에 재입학하는 대졸자의 70%를 여성이 차지할 정도다.

여성들의 이런 ‘소극적’ 태도는 어디서 비롯됐을까. 직접적으론 낮은 여성 취업률 등 현상적인 이유 탓이다. 그러나 원인(遠因)을 따지자면 어릴 때 교과서에서부터 여자를 ‘신사임당형’으로 키우는 교육경험 등 여성을 ‘인적자원’으로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 의식과 제도의 합작품이다.

▽직장에서의 두 가지 고비〓직장여성들이 겪는 장애물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결혼과 출산 때 찾아온다. 엄밀히 말하면 결혼과 출산 자체보다 가정과 직장을 병행할 수 없게 하는 직장여건과 사회의 배타적 분위기라는 장애다.

이 때문에 여성의 경제활동 인구는 30세를 전후해 크게 떨어진다. 국내 기업의 여성인력 평균 재직기간은 4.3년에 불과하다. 한국 여성의 경제활동 인구 분포를 보면 30세 전후에서 아래로 푹 꺼지는 ‘M자형’을 보인다. 가장 활발하게 일할 시기에 일을 그만두는 셈이다. 30세 전후에 퇴출된 여성인력의 상당수는 나중에 다시 경제활동에 진입한다. 하지만 오랜 공백으로 노동력의 질은 이미 떨어져 있다. 고용형태도 임시직 위주로 불안정하다.

어렵게 직장 일을 계속하더라도 여성들은 늘 ‘소수파’로서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한다. 상층부로 진입하기는 매우 어렵다. 작년에 노동부가 종업원 30명 이상 기업의 여성근로자 1133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임원 직급은 한명도 없었다. 과장급 이상도 16명으로 전체의 3.2%에 머물렀다. 여성 취업은 80년부터 97년까지 17년 동안 66.3% 늘었으나 서비스 판매직과 기능 단순근로직 등 일부 업종에 한정됐을 뿐이다.

▽미래를 대비하는 열쇠〓열악한 상황이지만 ‘변화의 싹’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점은 희망적이다. 삼성전자는 작년초 대리급 여성 109명을 한꺼번에 과장으로 승진시켰다. 종전 109명이었던 여성 과장을 갑절로 늘린 것이다.

파격인사는 그러나 삼성이 유별나게 여성을 우대하는 풍토라서가 아니다. 전체 임직원 중 여성이 30%인 이 회사의 경영진이 “여성인력 활용에 미래가 달려 있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삼성전자처럼 ‘눈을 뜬’ 기업들이 점점 늘고 있다.

한국여성개발원 김태홍 박사는 “기업체 스스로 여성인력의 잠재력 활용이 미래 경쟁력을 좌우한다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여성인력 활용은 이제 상징적인 차원을 넘어 기업의 미래를 여는 열쇠가 돼가고 있다.

이명재기자mjlee@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